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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너진 예술 영화관 지키는 파수꾼…그래도 영화가 가진 소통의 힘을 믿어요관리자작성일 21-10-02 09:45


2021.10.01  김시균 기자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21/10/935559/


나는 무너진 예술 영화관 지키는 파수꾼…그래도 영화가 가진 소통의 힘을 믿어요

l [Weekend Interview] 경남 유일의 예술영화관 `씨네아트 리좀` 하효선 대표


사진설명하효선 씨네아트 리좀 대표가 서울 마포구 토정로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시대에 예술 영화관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처럼 한국도 예술 영화관에 대한 공공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형기 기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는 씨네아트 '리좀'이라는 예술영화관이 있다. 상영관 한 곳에 45개 좌석이 전부인 곳이다. 그런데도 매해 300편씩 틀었으니 회차로 치면 약 2000회 넘는 영화가 이 작은 극장에서 명멸했다.

리좀은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8월 5일 휴관에 들어가 지금 재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330만명을 거느린 경남도와 108만명이 사는 창원시에서 잘 버티던 영화관이 코로나19에 잠시 쉬어가기로 한 것이다.

경남에서 영화 꽤나 사랑하는 사람이면 리좀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2015년 개관 첫해부터 삼삼오오 관객이 몰려들었다. 많을 때엔 연 1만5000명가량 오갔다고 한다.


최근 서울 마포구에서 예술영화 파수꾼을 만났다. 씨네아트 리좀을 이끄는 하효선 대표다. 하 대표는 1989년부터 프랑스 그르노블과 파리에서 21년간 살았다.

그곳에서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듯 그는 지역 시네클럽을 누비며 한국 영화 알리기에 앞장서 왔다. 2000년대 초중반 프랑스 한류의 시초인 '한국 설날 페스티벌'을 연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사이 수료한 박사과정 분야만 열 개가 넘는다. 프랑스 그르노블대학에서 국제정치와 미술사, 국제관계사 등을 수료했고, 이후 파리 3대학에서 영화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러곤 한국에 돌아와 씨네아트 '리좀'을 세운다.

다수가 예술극장을 외면하는 시대. 넷플릭스로도 충분히 영화를 향유 가능하다고 믿는 '죽은 예술영화관의 시대'에 리좀을 이끌어가는 그는 마치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 같았다. 왜 그리도 예술영화관을 지키려는 것인가. 그는 말했다.

"우리가 예술영화 보기를 그치는 순간 영화를 포기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무슨 의미인가.

▷영화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다양한 문화가 접목하고 교류하고 소통하며 내적 합의를 이루는 '장'이다. 그 장에서 당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매체가 영화다. 지역 극장으로 가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이슈가 된 영화를 볼 기회를 지역민들이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세계인이 고민하는 당대 주제를 논의하고 공감할 기회 자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너무 많이들 이 사실을 망각한다.

▷그만큼 예술영화의 힘이 무시되고 있다. 씨네아트 리좀이 생겨난 것은 이러한 악재에 대응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정부나 지자체는 예술영화 극장을 애써 외면한다. 오로지 우리 힘으로 이 난국을 타개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리좀 운영은 어떻게 이뤄지나.

▷리좀은 문화체육관광부 승인을 받은 경남에서한 유일한 예술영화 전용관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에는 롯데시네마 경남대와 메가박스 경남대가 상업영화관을 이루고 있다. 경남 전체 30여 개 영화관이 160여 개 스크린을 갖고 연간 1000여 편의 개봉영화를 튼다. 그중 약 25%를 스크린이 하나뿐인 리좀이 상영한다.

―경남에서 예술영화를 트는 곳은 사실상 리좀뿐이라는 건데.

▷한국 독립영화와 국내외 예술영화를 볼 수 있는 지역 내 유일한 곳이다. 정부는 헌법과 문화기본법에 명기된 정부 책임을 예술영화관을 운영하는 민간에 떠넘기기 일쑤다. 지난해 200만원이라는 소액의 프로그램 운영비만 지원받았다. 서울의 대한극장이 연 8000만원을 받은 것과 대조된다. 예술영화 지원도 지역 균형이 필요하다.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리좀을 찾은 관객은 많았다.

▷스크린 하나로 1년에 300편씩 틀었다. 회차로 따지면 연 2000회가량이다. 하루 4~5편, 많을 땐 7~8편을 돌렸다. 그럼 한 주에 20편이 넘어간다. 그렇게 5년간 1500편가량을 볼 수 있게 했다.

―리좀은 이미 2017년 폐관 위기를 겪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가 계기였다. '옥자'는 넷플릭스로부터 투자 받아 대형 스크린용으로 제작됐다. 봉 감독 자신도 영화관에서 볼 수 있길 바란다고 했으나 멀티플렉스들은 넷플릭스 작품이라며 보이콧을 했고, 비멀티플렉스 극장에서만 '옥자'를 틀었다. 그러나 리좀은 당시 '옥자'를 보여줄 디지털 영사기가 없었다.

―창원시가 지원을 안 하고 있나.

▷영사기 임대료를 시로부터 지원받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영화가 지역 문화의 주축을 이루는 그곳에서 영화 상영은 지자체가 앞장서서 지원해 줘야 하는 의무다. 그러나 우리는 극장을 만들긴 했지만 제대로 된 지원 한 푼 받지 못했고, 이 문제가 '옥자' 상영 건으로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한 시의원의 '5분 발언'까지 있자 그제야 3년간 영사기 임대료 지원을 해줬는데 3년이 지나니 도루묵이 됐다.

―다시 지원이 끊겼나.

▷지난해 코로나19가 창궐하니 창원시는 영사기 임대료 지원을 완전히 중단해버렸다. 경남 유일한 예술영화 극장을 동사시키겠다는 것으로 들렸다. 가난한 살림에 임대료를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무기한 휴관을 하게 된 거다.

―예술영화관 운영은 민간만이 짊어져서는 영속되기 어려운데.

▷그렇다. 지역 도서관이나 보건소, 학교를 민간이 관장하지 않는 것처럼 예술독립영화관 역시 정부 및 지자체가 책임지고 맡아줘야 하는 공적 영역이다.

―그러질 못하니 예술영화관이 하나둘 사라진다.

▷경남은 330만 인구에 예술영화관이 한 곳뿐이다. 게다가 시설은 매우 열악하다. 지금처럼 미디어가 일상화한 시대에 미디어와 영화 교육에 소홀한 것은 정부 실책이다. 그래도 한국 영화는 성장하지 않았느냐고 혹자는 반문할 수 있겠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세계가 보내는 최근의 찬사는 그간 처절하게 싸워온 영화인들의 공로지 정부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21년간 머문 프랑스는 어떤가.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국가가 학교 커리큘럼에 미술과 음악, 문학과 연극처럼 영화 수업이 들어가 있다. 내가 살던 그르노블시도 인접 지역까지 합쳐 45만의 인구에 5개의 예술영화관이 20여 개의 스크린을 보유한다. 이 숫자는 멀티플렉스와 일반 상업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제외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와 지자체는 이들 예술영화관을 모종의 의무감을 갖고 적극 지원해 주고 있다.

―프랑스로 건너갔던 계기는.

▷유학 전 출판사 일을 했다. 지방 무크지 '마산문화' 등을 발간했고, 신생 노동조합들의 노동조합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나는 10·18 부마민주항쟁 세대다. 한국에서 정치학 등을 전공하고 경남여성회를 만든 창단 멤버이기도 하다. 5·18 광주항쟁을 경험한 후 6월항쟁이 성공하면서 암울한 역사가 일단락됐다고 봤다. 1987년 대선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한국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긴 시점이었다. 민주화 시대로 들어섰다는 확신이 서자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프랑스로 유학 갔다. 1989년 2월, 30대 중반 나이였다.

―프랑스 한류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그르노블에서 한국 '설날 페스티벌'을 열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매해 5회를 조직했다. 그르노블은 리옹의 동쪽에 그리고 제네바 남쪽에 있다. 1968년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5년간 한국의 영화, 음악, 무용, 미술, 종교와 철학, 교육과 생활 그리고 음식과 놀이 등을 꾸준히 소개해왔다. 이 기간 한국영화 100여 편, 한국 예술인과 관련인 150여 명을 초청했고 연 인원 5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오게 했다. 이 페스티벌은 그르노블의 4대 축제로 꼽혔는데, 당시 그르노블 시장이 내게 '그르노블의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해주더라. 프랑스인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첫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일 거다.

―페스티벌이 중점을 뒀던 것은.

▷매해 주제를 정해서 한국 문화의 미학적 구조를 전하는 데 주력했다. 예컨대 영화라면 한국인의 정서를 깊이 다룰수록 인류 보편성을 잘 드러내준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려 했다. 그게 한국 영화의 강점임을 어필한 것이다. 이를 보여주고자 김기덕,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임권택, 김지운 같은 감독의 영화를 다수 소개했다. 이 페스티벌이 흥행하면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정치대학 부속 OPC (Observatoire Politique Culturel)에서 '문화예술기획 및 경영, 문화정책, 지역발전 최고전문가' 과정에 입학하게 해줬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였다. 여기서 프랑스 국가자격증도 취득했는데, 이 자격증이 있으면 루브르 박물관 관장이나 바스티유 오페라단 단장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창원에서 매우 고전하고 있다.

▷이달 30일부터 11월 7일까지 리좀에서 하는 '제3회 창원국제민주영화제'가 중요한 이유다. 리좀이 휴관에 들어갔지만 이런 지역 활동을 통해 예술영화관을 향한 정부와 지자체 관심을 어떻게든 재환기시키려고 한다.

―어떤 프로그램을 기획했나.

▷라틴아메리카, 러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영화를 4~6편 상영할 예정이다. 고인이 된 프랑스 아녜스 바르다의 회고전도 예정돼 있다. '더 파더' '누구나 아는 비밀' '화양연화' '스파이의 아내' 등도 해설하는 시간을 갖는다. 세네갈 문화부 영화진흥국장이 방문해 아프리카 영화를 소개하는 시간도 인상적일 것이다.

―왜 지금도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보나.

▷영화는 멈추지 않는다. 적어도 극장에서는.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동안 두 시간짜리 생명은 흘러간다. 어두운 공간에서 만난 첫 번째 이미지, 그리고 사운드. 엔딩 크레디트가 이르기까지 이어질 그것들의 연쇄. 이 모든 걸 아울러 감각하는 것이야말로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극장에서만 할 수 있다.


▶▶ 하효선 대표는…

1956년 경남 마산 출생. 1989년 남편, 두 자녀와 프랑스로 건너가 21년을 살았다. 프랑스 리옹대학에서 국제정치학, 그르노블대학에서 미술사·국제관계사, 파리3대학에서 영화학 박사과정 등을 거쳤다. 2002~2006년 '설날 페스티벌'을 연 프랑스 한류 1세대다. 경남 유일 예술영화관 '씨네아트 리좀'을 운영하고 있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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