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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씨네아트 리좀’ 하효선 대표와의 인터뷰관리자작성일 21-07-23 11:06


2021.07.22   주재옥 기자   뉴스브라이트
출처 : http://www.newsbrite.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063



창원 ‘씨네아트 리좀’ 하효선 대표와의 인터뷰 
'씨네아트 리좀’이 보는 지역적 관점과 현실

씨네아트 리좀 하효선 대표.
씨네아트 리좀 하효선 대표.


경남 유일의 예술영화전용관 씨네아트 리좀은 창원 구 마산 원도심 창동에서 2015년 개관했다. 씨네아트 리좀은 복합문화예술공간 ‘에스빠스 리좀’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21년 간의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2010년부터 다시 고향 마산(현 창원)에 정착한 그는 그의 부재 기간을 메우려는 듯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국제 예술인 레지던스 프로그램, 해외 전시, 창원민주영화제 등을 독자적으로 꾸려왔다. 

“지역 행정이 시궁창이면 지역민이 시궁창에 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건 지역만이 아니라 아직 성숙되지 않은 한국의 문화예술 전반이 현재까지 겹겹이 쌓아온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폐관 위기에 처해 있는 창원 씨네아트 리좀의 대표에게서 자신의 이야기와 고향에서 예술영화전용관을 운영하면서 숙지한 문제들을 인터뷰를 통해 들어 본다. 


질문: 창원에 유일한 예술독립영화전용관을 운영하고 계시지요.. 영화관이 창동예술촌이 있는 창동이라고 했는데 창동에서는 어떻게 활동하시게 되었나요. 

하: 2010년 21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자연스럽게 가족이 있는 이곳 마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저보다 10년 먼저 귀국한 남편이 지역에 있는 대학에 근무하면서 지역의 다양한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데 적극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시내버스 준공영제, 재래시장 살리기 등 여러 지역의 현안들을 연구하고 해결책을 제시했지요. 그 때는 원도심 도시재생 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당시 막 창동예술촌이 조성되었고, 당시 창동예술촌과 창동상인회 관계자들의 권유와 제안으로 창동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갓 고향으로 돌아 온 저는 젊은 시절을 보냈던 창동의 도시재생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매력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그 제안에 흔쾌히 응했습니다. 오랜 유학생활 동안 무언가에 온전히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은 삶을 살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와 그 경험을 되살려 사용할 수 있다면 본인과 고향을 위해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질문: 창동예술촌은 전국에서도 이름이 많이 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동예술촌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하: 창동예술촌은 남편인 서익진 교수가 집필한 『마산, 길을 찾다』 (2009년)에서 제시한 문화적 도심재생 방안을 바탕으로 당시 막 통합된 창원시가 신설한 도시재생과 초대과장이 서 교수의 이 책에서 받은 영감과 서 교수의 자문을 받아 조성한 것입니다.

창동예술촌은 서익진 교수의 도시재생에 대한 아이디어가 실현된 곳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죠. 사실 우리는 창동의 문화적 재생을 단지 창원이라는 지역 차원의 문제를 넘어 유사한 어려움에 처한 한국의 모든 원도심이 개발열풍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곳부터 우선 제대로 된 문화예술기반 도심재생을 실행하여 하나의 모델로 만들고자 했죠. 그리고 저는 특히 이곳을 글로벌 문화예술 교류의 지역 거점의 하나로 키워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질문: 한국의 다른 중소규모 도시에 비해 마산의 창동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가 무엇인가요?

하: 먼저 창동을 중심으로 하는 마산 원도심은 전국에서 쇠퇴의 정도가 가장 빠르고 가장 심한 곳으로 진단되었습니다. 마산이 전주와 더불어 국토부의 도시재생 테스트베드 사업지로 선정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제조업 중심의 상공업 도시의 쇠퇴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고도 공업화 시절 한일합섬, 마산수출자유지역, 창원기계공단, 마산항 등과 함께 급속히 성장해 한때 전국 7대 도시에 꼽혔던 마산은 2000년대에 들어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과 창원시의 분리 등으로 급격한 쇠락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마산 원도심은 제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제게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지역민의 온갖 향수와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바로 3.15의거와 10.18부마항쟁 그리고 1987년 6월항쟁 때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3.15의거에 적극 참여했다면, 저는 10.18부마항쟁에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저와 제 가족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에 역사의 저장고 같은 곳입니다.
 

질문: 그 때 갓 한국에 귀국하셨고 또 제안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프랑스에서도 문화예술 관련 활동을 하셨나요?  

하: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한국 설날페스티벌을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매해 총 5회 조직하였습니다. 그르노블은 리용의 동쪽에 그리고 제네바 남쪽에 위치하면서 알프스 산맥 지역의 초입에 있는 이 지역의 대표 도시로서 1968년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이기도 합니다.

페스티벌은 한국의 영화, 음악, 무용, 미술, 종교와 철학, 교육과 생활 그리고 음식과 놀이 등 다양한 소재로 기획되었습니다. 페스티벌이 지속되면서 그르노블 시와 론-알프스 지방 그리고 프랑스 문화통신부의 지원과 주불 한국대사관의 후원도 받았습니다.

이 때 한국영화 100여 편, 한국 예술인과 관련인 150여 명 초청 그리고 연인원 5만 명 이상의 관람객 및 수혜자들을 냈습니다. 이 페스티벌은 그르노블의 4대 축제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 페스티벌을 염두에 둔 그르노블 시장이  저를 ‘그르노블의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라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되었기에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프랑스 한류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질문: 아 그렇군요. 한류의 시작은 해외에 살고 있는 한인들의 역할이 컸겠군요. 그럼 유학가기 전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하: 출판사 일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지방 무크지 ‘마산문화’ 등 발간과 신생 노동조합이 탄생될 때 노동조합지를 발간해주면서 참 위험하고 가난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저희는 10.18 부마민주항쟁 세대입니다. 이후 5.18 광주항쟁을 경험하고 6월항쟁의 성공으로 지난한 암울한 역사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 대선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한국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이제 민주화 시대로 들어섰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질문 : 그럼 유학을 가게된 건 어떤 계기였나요?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하 :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우리가 할 일도 일단락되었고 곧 도래할 새로운 한국을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바깥에서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유학을 갔습니다. 늦게 간 유학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상황과 국제정치의 변화도 저희의 지적 호기심을 무한 발동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한국에서의 숨 막히는 생활에서 도망도 치고 싶었고요. 결국 1989년 2월 가족이 함께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프랑스 생활에 적응도 하기 전에 5월 중국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고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죠. 저는 이 엄청난 국제적 사건들에 직면해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겪은 온갖 어려움이 오히려 무기가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언어만 빼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마치 한국이 세계사의 중심에서 역사를 추동해가는 듯 생생한 에너지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는 한국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아시아 전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듯 했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국제무대에서 한국과 프랑스가 동등한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문: 공부를 많이 하셨던데 주로 어떤 학업을 하셨나요?

하: 저는 한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요. 프랑스에서는 그르노블 대학에서 국제정치와 미술사, 국제관계사를 각각 박사과정에서 공부하였고요. 이후 파리로 올라가서는 파리 3대학에서 영화학 박사과정에서 논문을 준비하면서 파리 사회과학대학원에서 사회인류학 박사과정 수업도 들었습니다. 특히 파리사회과학 대학원에서는 알랭 뚜렌, 피에르 부르뒤에, 자끄 오몽, 죠나당 프리드만 그리고 쟈끄 데리다 등 많은 석학들과 논쟁을 벌이며 저의 이론을 구축하고자 노력했지요. 그 중 다축문화, 자기완성, 수용이론 등은 많은 논쟁 끝에 인정받은 개념이며 이론입니다. 


그르노블 시 이제르 강과 샤르트르즈 산 설경.

그르노블 시 이제르 강과 샤르트르즈 산 설경.

질문: 그러니까 박사과정을 여러 개 하신 거네요. 국제정치, 역사학, 영화학, 문화사회인류학 등요. 

하: 네.. 미친 듯이 공부했죠. 제 앞에 놓인 모든 시간이 공부하는 시간이라 거침이 없었습니다. 특히 사회학과 알랭 뚜렌 교수와는 ‘여성학 정립을 위한 연구회’ 팀을 만들어 같이 연구활동을 했습니다. 알랭 뚜렌 교수는 언제나 수업시간에 “내가 사용하고 있는 이 ‘자기완성’이라는 개념은 저기 앉아 있는 ‘마담 하’가 정리한 용어로서...”라며 항상 나를 소개하며 수업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에서 여성학을 공부했고, 경남여성회를 만든 창단멤버입니다. 그 당시 한국의 여성운동과 이론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질문: 그러니까 사실은 페스티벌이었지만 실제로는 이론을 실전에서 확인하려는 것이었겠네요. 

하: 그렇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이론들을 바탕으로 실전에서 한국 페스티벌을 조직하여 비교문화적으로 한국문화를 알리고자 했기 때문에 프랑스 친구들은 이 페스티벌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페스티벌을 위해 제가 작성했던 한국예술의 여러 장르에 대한 불문 텍스트가 불어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마산에 살고 계신 조순자 명인을 2004년 그르노블로 초청하여 여창가곡을 처음 소개하였는데, 그 때 작성한 여창가곡 불문 소개문을 시작으로 한국의 전통 가곡이 유네스코에서 2010년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을 때는 감격과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영산회상곡 완주 등 많은 실험적 시도가 있었습니다. 


질문: 현지의 반응은 어땠나요? 

하: 그르노블 시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고 또 특히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대학생이 많아 분위기는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래선지 그르노블 시는 저의 활동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죠. 2005년 유네스코에서 제창한 ‘문화 다양성’이 매우 중요한 주제였는데 어떻게 접근해야할 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저는 ‘다축문화이론’으로 이에 대응했습니다. 다축문화이론이란 ‘멀티컬쳐’를 발전시킨 개념으로 문화는 어느 특정 지역에 모여 있는 또는 섞여 있는 다양한 색깔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의미와 역사 그리고 활용 등을 통해 구축된 것들이 각각의 축으로서 서로 교류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문화 다양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프랑스에 다양한 국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을 끊임없이 프랑스적으로 통합(Intergration)하려고 하면 그들은 고유한 색깔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데, 이를 모자이크에 비유해보면 여러 색깔을 가진 모자이크는 멀리서 바라보면 주류색깔로 동화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섞여있는 것보다 주류에 대응하는 각각의 문화적 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이죠. 


2005년 제 4회 그르노블 한국설날 페스티벌 ‘거리공연’ 그르노블 시가

2005년 제 4회 그르노블 한국설날 페스티벌 ‘거리공연’ 그르노블 시가

아무튼 이 페스티벌의 가치를 인정받아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그르노블 정치대학 부속 OPC (Observatoire Politique Culturel)‘ 문화예술기획 및 경영, 문화정책, 지역발전 최고전문가’과정에 아시아인 최초로 입학할 수 있었고 프랑스 국가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이 자격증은 루브르 박물관 관장이나 바스티유 오페라단 단장도 될 수 있는 자격증이죠. 프랑스와 세계의 많은 중요 예술기관의 장들이 이곳 출신이죠. 저는 지금 창원에서 씨네아트 리좀 운영으로 고전하고 있습니다만...


2005년 제 4회 그르노블 한국설날 페스티벌 ‘퍼레이드’ 그르노블 시가.

2005년 제 4회 그르노블 한국설날 페스티벌 ‘퍼레이드’ 그르노블 시가.

질문: 페스티벌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하: 매해 주제를 정해 다양한 장르로 구성함으로써 한국문화의 미학적 구조를 전달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공연을 통해 산조와 풍류를 비교해서 보여주는 것, 무대예술과 마당예술을 비교해서 보여주는 것, 여창가곡의 경우 연주의 구성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전통예술과 현대예술의 접점이 어디인지 그리고 서양음악 체계와 동양음악 체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심장박동을 근간으로 하는 서양 리듬과 호흡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국 리듬의 차이 등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술에서는 작품 전시를 통해 색깔, 여백, 농담 등을 서양 미술과 비교 설명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백미는 한국영화죠. 한국영화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깊이 다루면 다룰수록 인류적 보편성을 더욱 잘 드러내준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줌과 동시에 한국영화가 가진 이러한 자신감이 강점이라는 것을 그 당시부터 확인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김기덕,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김지운 그리고 임권택 감독들의 영화를 보여주고 이야기할 때 제가 어찌 자신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 그때가 벌써 20년 전입니다. 


2004년 제 3회 한국설날 페스티벌 ‘정중동’ 포스터

2004년 제 3회 한국설날 페스티벌 ‘정중동’ 포스터


질문: 이런 경험들이 한국에서 쓰여진다면 참 좋겠네요. 아까 창동예술촌과 문화예술 기반 도시재생을 위해 창동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제 좀 이해가 갑니다. 창동예술촌이 귀인을 만났네요. 

하: 뭐 귀인까지는 아니고요. 아마 저의 프랑스에서의 활동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남편 서익진일 거구요. 당시 창동예술촌 입주작가 협의회 회장인 김창수 관장께서 지역 출신이며 프랑스에서 활동 하시는 작가분으로부터 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남편 월급을 프랑스에서 페스티벌 조직하느라 다 탕진해 버려서 저도 남편 일을 돕는 게 자연스러웠죠. 이 일도 돈을 버는 일이 아니었기에 결국 또 남편 월급을 다 쏟아 부었지만요. 하지만 무엇보다 고향의 도시재생 활동에 도움이 되고도 싶었고요. 아~ 그 때 좀 더 고민하고 결정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저희가 이곳 창동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3년 예술인 레지던스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질문: 창동예술촌과 예술인 레지던스 사업은 상호보완적인 사업인 것 같네요. 어떤 사업인가요?

하: 예술인 레지던스 사업은 해외 중견예술인과 지역의 예술인이 서로 소통하며 개인 작업 또는 협업으로 서로의 작업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작업의 깊이와 완성도를 극대화하고 각자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남 지역이 상대적으로 국제 문화예술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지 않아 이 사업을 통해 지역의 글로벌 문화예술 교류의 거점을 만들고자 한 것이지요. 실제로 2013년에는 설치, 조각, 회화, 피아노, 성악 한국무용, 바로크 발레 등 총 8명의 예술인으로 구성했는데, 한국 예술인 3명에 프랑스 3명, 이란 1명, 홍콩 1명의 예술인이 6개월 간 작업하여 전시, 퍼포먼스, 공연 등을 아주 성공적으로 치러낸 한해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사업은 지속되었습니다. 코로나 직전까지는요. 그동안 다양한 국적의 예술인 약 50명 정도가 저희 레지던스를 거쳐갔습니다. 


질문: 창동이 살아났겠네요. 보지 않았지만 아주 훌륭한 성과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창동예술촌을 창원시가 조성했다고 하셨는데 창원시는 많이 도와주었나요?

하: 아뇨. 먼저 레지던스 사업은 경상남도가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지원금을 받긴 하지만 임대료, 인건비, 공과금 등은 자부담으로 진행됩니다. 일은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어요. 경험도 있고요. 아이디어는 넘쳐납니다. 이런 일은 개인적 성취도 있겠지만 사회적 기능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결국 도시의 콘텐츠를 풍부하게 만드는 일이고 도시의 문화적 토양을 건실하게 배양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도시를 위한 이런 일들을 이곳에서는 개인이 사비를 들여야만 가능하고, 아무리 잘 해도 이곳에서는 빛이 안나요. 모든 노력과 결과가 성공적이었다 해도 지역에서 지자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 성과를 유지하고 키워나갈 수가 없어요. 이런 일은 시민과 도민에게 새로운 문화적 경험과 향유를 주기 위한 것인데요 이 지역은 처음부터 이런 사업에 무관심과 푸대접 일색입니다. 그래서 지역의 시민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이며, 누가 살고 있으며, 어떤 정책들이 펼쳐지는지 그리고 자신의 세금이 누가 어떤 마인드로 사용되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어느 지역은 문화예술이 번성하는 데 이 지역은 이렇게 막혀있는 지를요. 

가끔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다보면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자신이 알아서 해라’, ‘그런 일을 왜 나서서 하면서 고생을 사서 하느냐 지자체가 하도록 두지’, 그리고 ‘누구라도 하고 있으니 된 거지’라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돈이 나오니까 하지 자기 돈으로 그 짓 하겠어?’라고도 한답니다. 그런 말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표현에는 지역의 양심 있고 건전한 시민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회에 말씀드리자면 이곳은 선진 의식을 가진 지식인이나 양심적인 시민 그리고 사회와 개인을 이어주고자 노력하는 귀감이 될 만한 원로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또 개인이 가진 부와 재 그리고 역량을 사회에 환원하고 순환시키고자 하는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고, 그런 사람을 마치 미성숙한 사람으로 보는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그런데다가 어디서든 그렇겠지만 이곳의 정치인들도 다음 선거에 유리한 딱 그곳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제가 경험한 경상남도와 창원시는 심하게 말하면 비전도 소통도 없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그저 실적만 중시하고 무식한 폭력만 행사합니다. 혹시 제가 잘못 이해했거나 저만 유독 이 엄청나고 상상 불가능한 일을 당하기만 했을까요? 그리고 지역이 지방인 것은 튀는 것, 새로운 것이 수용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이곳은 유독 폐쇄적이고 보수적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차이가 없어요. 


2018년 리좀 국제 레지던스 피날레 전시 중.

2018년 리좀 국제 레지던스 피날레 전시 중.


질문: 안타깝네요. 하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는 갑니다. 지방에 계시는 많은 분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수도권보다 다른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현재 씨네아트 리좀이 폐간의 위험에 있다고 하던데 상황은 어떤가요?

하: 아마 조만간 휴관에 들어갈 겁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듭니다. 씨네아트 리좀은 2015년 12월 23일 개관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개관하던 당시 정부의 영화관 지원정책이 혼선을 빚어 전국에서 10여 개의 단관극장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2014년에 경남에 유일했던 예술영화관인 거제아트시네마가 폐관하였고요.

 
게다가 경남은 우리 역사에 길이 오점으로 남을 엄청난 일을 겪었습니다. 홍준표 전 도지사가 진주의료원 폐쇄와 함께 갓 만들어진 경남콘텐츠진흥원과 경남영상위원회를 경남문화재단에 통폐합 시키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경남의 영상문화 발전의 싹을 아예 잘라버린 사건이었지요. 문화예술의 감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전혀 감지조차 못한 무지의 소산이었거나 아니면 영상부문이 가진 강력한 저항의 힘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도 저도 아니었다면 아마 천박한 경제관념으로 무조건 돈 아끼기 작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가 경남의 문화예술 발전을 처음부터 왜곡시켜 버린 것이지요.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그리고 문화예술 분야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이 엄청난 일을 어찌할 바 몰랐고 또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우선 가장 시급한 것이 이 지역에 영상분야의 부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것만은 가능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여기서 영화란 영화사적으로 매겨진 영화들, 즉 중요한 세계적인 영화제들에서 매해 심혈을 기우려 찾아내는 영화들을 말합니다. 당시 경남의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수익이 기대되지 않는 영화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이해가 되죠.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영화로 돈벌이를 하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영화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접목하고 교류하면서 소통하며 또한 내적 합의를 이루며 당대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또 해결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입니다. 세계의 주요 영화제에서 주요 이슈가 된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는 것은 당대의 세계인이 고민하는 주제를 함께 논의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함과 동시에 이 논의의 장에서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중요한 세계사적 관심에서 배제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홍준표 씨와 같은 인물이 무지로 인해 경남의 영상산업을 왜곡시키고 초토화했다 해도 시민으로서 우리는 그 악영향을 최소화 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씨네아트 리좀은 생겨났고 이러한 악재에 대응한 결과물입니다. 아직도 지자체는 리좀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질문: 씨네아트 리좀이 2017년인가 폐관의 위험이 있었고 창원시가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 네, 맞습니다. 2017년에 한 번의 폐관 위기가 있었지요. 바로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넷플릭스가 엄청난 투자를 받아 대형 스크린용으로 만든 영화라 봉준호 감독도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멀티플렉스들은 상영을 거부했죠. 그래서 결국 비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만 스크린을 통해 ‘옥자’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씨네아트 리좀은 디지털 영사기가 없어 옥자를 상영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극장을 만들긴 했지만 제대로 된 영사기가 없어 개봉할 수 있는 영화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기에 이미 극장의 운영이 심각한 상태였지요. ‘옥자’ 상영 건으로 리좀의 상영기 문제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한 시의원의 ‘5분발언’까지 있자 창원시는 급기야 3년 간 영사기 임대료 지원을 결정했지요. 그런데 딱 3년이 지난 작년에 코로나가 한참 창궐해 모든 극장이 살얼음을 걷고 있을 때 창원시는 영사기 장비 임대료 지원을 중단해 버렸습니다. 안그래도 가난한 살림에 임대료는 고스란히 저희의 부담으로 넘어왔습니다. 살얼음을 조심스레 걷고있는 사람 발에다 큰 돌멩이를 내리친 격이죠. 그렇게 동사시켜버리는 게 이곳의 지자체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창원시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진행된 창원시 도시재생 선도사업에 국고와 시비 200억 원을 투입했습니다. 그 중 유일한 프로그램 사업인 창동예술촌 국제화 사업 중 예술인 레지던스 사업에 저희가 참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창원시에서 2년이나 사업실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업을 실행할 준비와 함께 레지던스 공간을 유지하느라 매달 몇 백만원씩 남편 월급으로 지탱해 왔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문의했더니 담당과장 왈 ‘창동예술촌 국제화 사업은 사업을 따기 위해 들어간 것이고, 그 사업을 실행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관련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창원시 도시재생 선도사업은 바로 그 창동예술촌 국제화 사업이라는 독보적인 프로
그램 사업 덕분에 타 지역과의 차별성이 인정되어 선도사업 선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그리고 창동예술촌 국제화 사업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저희가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젝트가 작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원시는 애초부터 이 사업을 실행할 마음은 없었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건가요. 그 후 국제화 사업 예산 10억 원 중 7억 원을 전용하여 현재 창동아트센터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창원시가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저희가 직접 관련된 일이고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만, 이런 일이 과연 저희에게만 일어난 일 일까요?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초기 레지던스 사업을 지켜보던 창원시가 결과에 만족하여 저희가 세든 건물 지하에 레지던스에 필요한 소극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레지던스 프로그램 예산은 없고, 그나마 기대하던 선도사업의 해당 사업비는 건물 구입에 전용하고, 창동예술촌 입주업체 자격으로 2년 간 지원해오던 임대료 지원마저 일방적으로 중단하더니 사용하는 건물에서 퇴거하라는 명령을 공문으로 보내왔습니다. 이유는 건물주와 임대료 조정에 합의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가면 건물주에게 공간을 사용하게 할 수는 없다며 설치한 시설을 철거하겠다고 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 피 같은 세금으로, 그 귀한 소극장을, 지은 지 1년 남짓 지나서 조성비의 30% 정도를 다시 들여 철거하는 것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결정한 뒤 일방적으로 위탁 사용자에게 통보하는 시 공무원을 보고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도 소극장은 사수해야 했습니다. 아니 부수도록 그냥 두어야 했을까요? 그랬어야 했는데... 결국 남편이 사는 집을 담보 잡혀 신용대출 받고, 마이너스 통장 개설하고, 남편이 긴급조치 9호에 연루되어 1년 6개월 옥살이 하고 재심으로 무죄 판결 받은 후 수령한 배상금 등을 투입해 지금의 씨네아트 리좀, 카페와 갤러리 리좀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리좀이 만들어졌습니다. 


질문: 경남 유일의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알고 있는데 민간이 운영하는 영화관이군요. 운영은 잘 되나요?

하: 우선 씨네아트 리좀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승인받은 경남 유일의 예술영화전용관으로 개봉관입니다. 씨네아트 리좀이 있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에는 롯데시네마 경남대와 메가박스 경남대가 개봉관으로서 일반영화 상영관입니다. 보통 상업영화관이라고 하죠. 경남 전체로 30여 개 영화관이 160여 개의 스크린을 가지고 연간 1,000여 편의 개봉영화를 상영하는데, 그 중 약 25%의 영화를 스크린 하나밖에 없는 소형 영화관 씨네아트 리좀이 상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개봉작들 중 약 20%는 씨네아트 리좀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대부분 한국 독립영화와 국내외 예술영화죠. 정부는 이들 예술영화전용관에게 프로그램 운영비로 일정 금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지원금에 왜 고마워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느냐하고 하는  하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런데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봅시다. 

정부는 헌법과 문화기본법에 명기된 정부의 책임을 예술영화관을 운영하는 민간에게 떠넘기고 그 댓가로 지원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원금 액수는 제대로 된 운영을 하는 데는 턱도 없이 모자랍니다. 게다가 씨네아트 리좀은 창원시가 공간과 영사장비에 지원하던 것을 중단하는 바람에 프로그램 활용으로 관객에게 돌아가야 할 지원금이 공간 유지비용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타 지역의 영화관이 프로그램을 활성화할 때 우리는 극장을 유지하는 쪽으로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죠. 더욱이 지방은 영화 관련 전문가를 초청하기에도 사정이 가장 안 좋습니다. 수도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경비와 시간이 곱절로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민을 위해 지자체가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부르짖는 지역 균형발전이 가능할까요. 

해마다 씨네아트 리좀과 리좀 공간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문화예술 기획단체인 ACC프로젝트는 국고 따 내기에 전력을 쏟습니다. 실력인지 요행인지 저희가 수행해온 대부분의 사업이 국고로 치루어졌습니다. 관례인지 실용적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국비 지원금은 신청 사업비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선에서 결정됩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국고를 지원을 받은 사업은 대개 지자체가 그 사업의 가치를 인정해 매칭 자금을 대주거나 해당 사업이 잘 이행되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 지역에서는 전혀 없습니다. 적어도 저희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아마 문화예술 쪽에서 국비 지원을 따 내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 잘 모르는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저희 사업은 점점 축소되고 활력을 잃게 되죠. 그렇게 모든 것이 하나씩 사그러들어 가더군요 

영화관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많은 지인들의 우려가 컸습니다만, 이건 서로 믿음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걱정하시는 많은 분들은 예술영화란 어렵고 재미없고 사람들이 많이 보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는 이 지역민의 대부분은 예술영화관이 없는 곳에서 쭉 살아왔고 예술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고 그저 멀티플렉스 극장의 오락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죠.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경험할 기회조차 없으니 당연한 거죠.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예술영화를 접하고 또 알게 되면 예술영화와 틀림없이 친근해질 분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예술영화를 접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홍준표 전 도지사의 폭력과 무지에서 지역의 영상문화를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330만 명에 달하는 경남도민이 100만이 넘는 창원시민들이 이 50석 짜리 극장을 유지할 수 없다면, 이 지역은 희망이 없는 도시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관을 했지요. 그런데 운영의 어려움은 민간 운영자의 어려움이지만, 이것이 지역과 도시의 문화예술 향유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질문: 실제로 최근에 군단위로 많은 작은영화관을 정부와 지자체가 건립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항과 천안 그리고 광주에는 독립영화관도 정부와 지자체가 건립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예술영화관은 왜 민간에게 맡겨져 있는 건가요? 어차피 수익은 안 되지만 예술영화나 독립영화가 인문학적 교육적 가치는 일반상업영화보다 탁월한데요. 

하: 맞습니다. 예술독립영화관 운영은 결코 민간이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닌 것입니다. 도서관이나 보건소를 민간이 운영하지 않으며, 학교를 정부가 관장하듯이 예술독립영화관은 정부나 지자체가 맡아야 하는 영역입니다. 이미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국가가 학교 커리큘럼에 미술과 음악 수업 그리고 문학과 연극처럼 영화 수업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던 그르노블 시도 인접 지역까지 합쳐 45만의 인구에 5개의 예술영화관이 20여 개의 스크린을 가지고 있고, 정부와 지자체가 이들을 지원합니다. 이 숫자는 멀티플렉스와 일반 상업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제외한 것입니다. 프랑스인들의 식탁에 음식만큼 중요한 것이 대화이죠. 그 수다에서 가장 격조 높은 화제는 영화인데 당연히 예술영화죠. 

경남은 330만 인구에 예술영화관이 하나에 스크린도 달랑 하나입니다. 게다가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고요. 지금처럼 미디어가 일상화하고 메타버스까지 도래한 시대에 미디어와 영화 교육에 소홀한 것은 한국 정부의 가장 큰 실책입니다. 그래도 한국 영화는 성장하지 않았나고요? 어떻게 성장했나요? 세계가 보내는 찬사는 아마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게 싸워 빛을 발한 영화인들에게 주는 것이겠지요. 한국 영화의 성공과 정부는 아무 관계도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척에 있는 부산이 영화의 전당으로 도시 브랜드를 만들어 갈 때 경남과 창원은 이 50석 짜리 영화관을 민간에게 짊어지게 하고, 그나마 지원하던 영사기 장비 임대료까지 없애버린 곳입니다. 창원이 그리고 경남이 이러고서도 인구유출 문제를 걱정한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입니다.  

시민들의 영화 문화 향유를 위해서는 국가나 지자체가 제대로 된 관람 시설과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예술영화관이 시민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영화 관련 서비스와 공동체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이미 부산 ‘영화의 전당’, 전주 ‘디지털 독립영화관’ 그리고 인천 미추홀구의 ‘영화공간 주안’은 지자체가 건립해 민간 위탁으로 운영하면서 영화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멀티플렉스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정부는 지자체와 함께 군 지역에 영화관을 설치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바로 ‘작은영화관’입니다. 경남에도 하동, 합천, 고성, 함안, 남해, 의령, 산청 등에 생겼거나 생길 예정이고, 위탁 또는 직영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영화관 건립 사업은 영상문화 향유권을 제고하고 지역 간 문화 격차를 해소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으며, ‘수익성 문제로 상업극장이 진출하지 못하는, 소위 문화 사각지대에서도 최신 개봉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여 가족 중심의 여가문화 확산은 물론, 삶의 질 제고에도 기여하고 새로운 영화 수요층을 발굴하는 등 파급효과’를 낳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인 “문화향유 기회 확대와 지역문화격차 해소”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문체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서 군 지역에 ‘작은영화관’을 설립하는 것은 도시의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주로 상영하는 상업영화, 즉 헐리우드나 재벌 기업 등 대형제작사들이 만든 영화를 군민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요컨대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였던 “문화향유 기회 확대와 지역문화격차 해소”에 더 잘 부합하는 정책은 정부가 혼신을 다해 예술·독립영화 제작을 장려하고 그 상영전용관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상업영화와 멀티플렉스가 그런 목적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불행하지만 ‘작은영화관’들은 상업영화관화 되고 있습니다. 애초 예술영화 인구를 양성한다는 생각은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위의 취지에 더 적합한 것은 예술·독립영화이니까요.  

‘작은영화관’ 건립 정책은 혹시 대형 제작사들의 상영영화의 상영관을 늘려주거나 정부의 입장에서 ‘불편한’ 영화의 상영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비록 모든 지자체가 ‘작은영화관’을 건립할 때는 미처 이러한 의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지난 보수정권의 블랙리스트와 다이빙벨 상영 건으로 부산영화제가 파행을 빚은 일과 전국 예술영화관들에 대한 지원금 제도의 의도적인 혼선으로 10여 개의 영화관이 사라지게 만든 일에 대해 어떤 반성과 후속조치가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상남도에서 홍준표 전 도지사에 의해 경남의 영상문화가 파국을 맞은 것이 분명한데도 정부는 이에 대해 나 몰라라 해왔습니다.  



씨네아트 리좀 내부.

씨네아트 리좀 내부.


질문: 엎친데 덥친 격으로 코로나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겠네요. 

하: 네 그렇습니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맞았습니다. 정부의 정책 변화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오던 예술영화관들은 코로나로 인해 그 취약함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고, 10년 전에 받던 액수보다 줄어든 지원금으로 겨우 명줄을 이어오다가 코로나19라는 직격탄을 맞은 것이죠. 씨네아트 리좀은 적자가 월 1,000만 원이 넘습니다. 월세가 비싼 지역은 그 적자의 폭이 더 클 것이 당연하죠. 게다가 나를 비롯한 극장 대표들은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는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이를 지켜보는 많은 이들이 우리를 지탄합니다. 왜 적자를 보면서도 폐관하지 않냐구요. 실제로 엄청난 적자를 지고서도 아직 전국에 몇 개 안 되는 예술영화관들은 버티기에 돌입한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극장 문을 닫는 것은 곧 영화의 분서갱유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교인이 줄었다고 교회가 문을 닫을 수는 없고, 도서관 이용자가 줄었다고 해서 도서관을 없애버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것을 민간이 지키든 정부나 지자체가 지키든 말입니다. 


영화관 업계 정상화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 .

영화관 업계 정상화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 .


이제 한국의 영상문화 전반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 전환과 공평하고 균형적인 시스템의 수립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독립·예술영화관을 더 이상 산업과 시장 측면에서가 아니라 문화예술 공공 서비스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공공문화시설의 하나로서 이에 걸맞는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질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2021 리좀영화교실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하시던데 리좀영화교실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하: 올해 처음 시작한 영화교실입니다. 매우 알찬 프로그램으로 수강생과 진행팀 그리고 강사 모두의 만족도가 높아 보람이 있었습니다. 무심한 지자체, 열악한 시설과 주차 문제 그리고 코로나로 인한 타격 등으로 질식상태에 빠져 폐관을 생각하고 있지만, 이 지역에 영화 인구의 예술영화에 대한 요구까지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폐관할 때 하더라도 폐관 전에 꼭 지역민의 예술영화에 관한 관심도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총 25강의, 연 75시간, 총 13명의 강사로 구성된 강좌 프로그램을 약 2개월 간 진행한 ‘2021 리좀영화교실’은 평균 90%의 출석률을 보였습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씨네아트 리좀의 운영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놓고 시설이나 환경의 열악함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영화관은 정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것으로 알았다며, 민간이 운영하면서 적자를 내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고도 했습니다. 이번 2021 리좀영화교실도 충분한 지원이 있기에 무료로 진행하는 걸로 믿었다고 합니다. 지원은 강사료, 보조원 1명 인건비, 보고서 작성비에만 투입되고 나머지 일체의 운영비는 주관단체가 부담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거죠. 그러나 정부의 지원제도가 항상 그렇듯이 고생은 진행자가 하고 생색은 정부가 내는 시스템이죠. 이 어려운 시기에 예산 절반을 자부담으로 진행하면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이 지역의 지역민들의 예술·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이 결코 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2021년 리좀영화교실을 마치고.

2021년 리좀영화교실을 마치고.

질문: 그렇군요. 많이 힘들었겠군요. 제가 듣기로는 창원민주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도 설명 좀 해 주시죠. 

하: 마산창원 지역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1960년 3.15 의거와 1979년 10.18부마항쟁의 도시로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곳입니다. 부패정권과 독재정권을 무너뜨려 민주화의 성지라 불리는 도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지역은 또한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기계공단으로 한국 산업화의 전초기지와도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의 주민은 높은 시민의식과 한국의 산업화를 주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후대에 물려줄 의무와 책임을 가진 지역입니다. 창원민주영화제는 지자체의 지원이 없더라도 조건이 허락하는 한 유지하고자 합니다. 

도시란 것이 도지사나 시장 또는 도청과 시청 공무원의 도시는 아니지 않습니까. 도시는 그곳에 사는 도시민의 것이고, 해당 도시민의 역량에 맞게 발전하기 마련이죠. 아무리 설명을 하고 사정을 호소해도 이 지역의 지자체들은 이러한 지역의 역사성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제는 계속될 것이고, 조만간 국제영화제로 키워나갈 것입니다. 이곳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시작하고 발전시킨 곳 아닙니까. 민주시민의 역량은 결코 스스로 굴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이 20년을 공들여 일군 거창연극제를 한순간에 갈취해가는 지역이며, 콘텐츠진흥원과 영상위원회를 너무나 허무하게 없애버리는 지역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민주적이며 폭력적인 그리고 시민들의 노력을 한순간에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리는 지역임을 잘 알아야 하고 또 이에 맞게 대처해야 합니다. 저는 제가 3.15의거의 자식이며 10.18부마항쟁의 주체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원민주영화제는 도시의 정체성이자 바로 저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질문: 영화제가 오래되지 않았군요. 어떤 내용의 영화제인가요?

하 : 2019년 제 1회 영화제는 ‘5대륙의 민주화’라는 대주제 하에 한국의 민주화, 중국의 민주화와 천안문 항쟁, 베를린 장벽 붕괴와 그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은? 한반도의 두 국가, 남한과 북한 등 5개의 섹션 그리고 켄로치 회고전으로 구성되었고요. 총 39편 영화가 98회에 걸쳐 상영되었으며, 수차례의 관객과의 대화 그리고 라운드 테이블 등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때는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이라 부마민주재단이 설립되었고, 40주년 기념행사에 영화제가 포함되어 있어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같이 영화제 예산을 대고 진행했었습니다.  

2020년 제 2회 창원민주영화제는 ‘저널리즘다큐 그리고 디케(정의의 여신)‘이라는 대주제로 저널리즘 다큐, 프레스월드, 디케 등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으며, 다큐멘터리의 저널리즘적 역할을 통해 언론의 실태를 조명해 보고자 했고요. 그리고 이런 양상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디케(정의의 여신)들의 활약과 기여를 드러내 보고자 했습니다. 총 27편의 영화가 64회에 걸쳐 상영되었고, 총 11명의 게스트가 초청되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시점이라 많이 조심스러웠지만 다행히 잘 진행되었습니다. 


2020년 창원민주영화제 포스터.

2020년 창원민주영화제 포스터.


2021년 제 3회 창원민주영화제는 ‘영화적 시각과 민주주의’란 주제로 프로그램을 한창 고민 중에 있습니다. 

압니다. 시설 열악하고 천장이 낮아 자막을 볼때도 불편하고요. 주차문제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개인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예술·독립영화가 지닌 공공적 역할을 이해한다면 시민이 나서서 정부나 지자체가 해결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부산 ‘영화의 전당’이 부산 시민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창원시와 경상남도에 살고 계신 지역민들은 어쩔 수 없이 지하 51석의 천고가 낮아 앞사람 머리를 피해가며 자막을 보아야 하고, 주차 문제에 짜증나는 그런 영화관에서 독립·예술영화를 보도록 방치하고 있는 지자체의 시민인 것입니다. 
 

질문 : 앞으로의 계획은요?

하 : 아마 전국의 예술영화관들이 속속 무너질 것입니다. 씨네아트 리좀을 비롯해 각 시도에 하나씩밖에 없는 전국의 모든 극장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대구 동성아트홀은 이미 장기 휴관에 들어갔고요. 인천의 미림극장도 위험수위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미림극장 살리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는 서울과 수도권의 몇몇 극장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아마 지자체 소유의 영화관을 위탁 운영하는 인천 ‘영화공간 주안’과 전주 ‘디지털독립영화관’은 어렵긴 하겠지만 없어지지는 않겠죠. 여러 채널을 통해 영진위와 정부에 지원 호소와 정책 제안을 하고는 있지만 ‘쇠 귀에 경 읽기’라고나 할까요. 

아마 지금부터 1년도 채 남지않은 정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가 될 것 같습니다. 각 영화관이 속한 지자체에 법적근거를 대면서 책임성 있는 행정을 재삼 요구해야 할 것이고요. 정부의 정책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은 전국예술영화관협회 회원 극장들이 함께 해결을 위한 강도 높은 행동을 취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인터뷰가 널리 잘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 장 시간 감사합니다. 여태 해 오신 것처럼 잘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하 : 감사합니다.






진옥희 기자  joh@newsbrit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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