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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생명은 늙고 사물은 낡는다. 그래서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어쩌면 쓸쓸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그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는 있다. 더구나 어두운 일로 가득했던 삶을 산 노인들의 어두운 얼굴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두운 삶에 대한 밝은 헌사, 홍일화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예술촌 갤러리 리좀 3층에서 '숲'이란 주제로 전시를 여는 홍일화(46) 작가.
한국과 프랑스, 미국 등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20여 년간 꾸준히 여성을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처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그려보라는 제안을 받고 살펴본 할머니들의 얼굴은 너무나 어두웠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얼굴에 화려한 장식을 입혔다. 그의 '마담'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힘들었던 할머니들의 삶에 대한 헌화(獻花)이자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밝은 선물이었다.
그의 작업은 제주 곶자왈과 해녀 할머니들로 이어진다. 곶자왈 작업을 하면서 그는 해녀 할머니들 얼굴도 그렸다. 고단한 삶의 주름을 가득 간직한 할머니들의 얼굴 역시 환한 꽃으로 장식했다. 그가 제주만의 특별한 숲 곶자왈에서 발견한 생명의 존재 방식 역시 위안부나 해녀 할머니들 혹은 우리나라 여성의 삶과 비슷했다.
▲ 홍일화 작가 작 '곶자왈' 일부. /이서후 기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얹혀 있고 덮여 있으며 깔렸고 부러져 있다. 그렇게 부러진 형태에 작은 기운이 몰래 숨죽이며 형태를 드러낸다. 이게 제주의 곶자왈이며 내가 듣고 자란 생존을 위한 할머니, 어머니들 삶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 지난해 5월 제주에서 열린 '곶자왈 속 해녀' 전시 팸플릿 중에서
곶자왈 역시 생명 활동이 만든 시간의 중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 곶자왈은 아주 어두운 곳이지만, 그는 밝고 선명한 색으로 묘사했다. 마담 시리즈에서 할머니들의 얼굴을 화려하게 장식한 이유와 같다.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든 생각이기도 한데, 삶의 힘든 부분 혹은 어두운 역사를 어두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너무 보기 힘들어서 등을 돌릴지도 몰라요. 그래서 밝게 표현해서 일단은 그런 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자는 거죠."
홍 작가의 곶자왈 그림은 8월 7일까지 볼 수 있다. 문의 갤러리 리좀 070-8802-6438.
◇팍팍한 삶에 대한 애정, 이상갑
경남도립미술관 3층 로비와 4, 5전시실에서 열리는 도내 1세대 서양화가 이상갑(1920~1996)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도 시간과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만날 수 있다.
"이 화백 작품은 사실주의보다는 인상주의에 가까운 구상화가 주를 이룬다. 고향 마산과 들, 바다, 해변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보냈던 유년 시절의 정서적·물질적 풍요로움이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따스하고 안정감 있는 회화적 표현으로 그의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 경남도립미술관 전시 설명 중에서
대표적으로 마산어시장 풍경을 그린 '삶'(1995)이나 '삶 그리고 사랑'(1994)이란 작품을 들 수 있다. 팍팍한 생활들이 드러난 그림이지만, 도리어 화사한 느낌이다. 이런 색감에는 분명히 팍팍한 삶의 자리 역시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작가의 심성이 담겨 있을 테다. 볏단 위에서 쉬는 초로의 농민을 그린 '휴식'(1979), 생선을 파는 어시장 상인을 그린 '파장'(1978) 같은 인물화에서 보이는 밝은 색감은 고된 삶에 화사함을 선사하려 했던 홍일화 작가의 작업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상갑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는 9월 16일까지다. 문의 경남도립미술관 055-254-4600.
◇어둠을 표현한 밝음, 우제길
시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열리는 우제길(78) 전시에서 절정에 이른다. 지난해 제18회 문신미술상을 받은 우 작가의 신작과 대표작 30여 점을 볼 수 있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선정 한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 100인에 꼽힌 우제길 작가는 색채 추상의 대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을 보면 마치 빛의 모자이크 같다. 첩첩 쌓인 화려한 색깔은 어쩌면 복잡하고 어두웠던 한국 근현대사를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모순된 현대사를 겪으며 앞에 나서지 못한 부끄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마음을 담아 제작한 그날의 소리 그리고 빛 설치 작품은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관람객이 뽑은 최고 인기작가상에 선정되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어둠을 표현한 밝음. 이런 관점에서 작품을 보면 뭔가 애잔함과 따스함이 묻어나는 것 같다. 특히 이번 전시에 선뵌 신작 '4월의 빛' 시리즈는 어둠 속에서 희망처럼 일어나는 한 줄기 빛 같은 느낌이어서 더욱 그렇다. 우제길 작가의 전시는 8월 2일까지다. 문의 문신미술관 055-225-7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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