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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음악극 <그대, 가을에 부처>관리자작성일 18-11-02 00:00


낭독음악극
<그대, 가을에 부처>


소재 : 3·15의 소소사
일시 : 2018년 11월 2일(금) 19:00
장소 : 에스빠스리좀 3층
극본·기획 : 손상민 
출연 : 서은주(가야금), 신근영(거문고), 정동주(장구), 김지희(해금)
        김참이(노래),강주성(배우), 김소정(배우)
촬영 : 최정민, 세골렌 페로





기획의도
1960년 3·15의거는 우리 지역의 대표적 항거이자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혁명적 사건임에도 이를 제대로 반추해 본 기억이 없다. 3·15의거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저 빛바랜 역사에 불과할런지 모른다. 하지만 12명의 희생자와 수 십 명의 부상자 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그날의 기억은 어떤 상흔으로 남아 있을까.

<그대, 가을에 부쳐>는 죽은 자들을 뒤로 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편지 낭독극 형식으로 들려주는 ‘낭독음악극’이다. 죽은 자들을 대신해 꿈을 꾸었고 사랑을 했고 가족을 꾸렸던, 살아남은 우리들이 죽은 자들을 대신해 그들의 마음을 되짚어 본다.

줄거리

1965년 독일로 건너간 선영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수신인은 마산의 40대 조각가인 정수이다. 그가 동봉한 사진에는 세 명의 인물이 찍혀있다. 선영과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그의 아버지 영준 그리고 또 한 사람. 정수는 자신의 아버지와 선영의 이 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만 선영은 쉽사리 털어놓지 않는다. 편지가 오고가는 동안 정수는 3·15의거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데…
잊혀진 그들의 봄을 2018년 마산의 가을에 다시 만난다.



시나리오
등장인물
김순영(74)
1942년 6월생. 1960년 3월 15일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1965년 파독간호사로 독일로 이주, 50년 넘게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다. 의사였던 독일인 남편을 만나 1남 1녀를 낳았고 현재는 혼자다. 유방암이 재발해 온 몸에 전이되어 지금은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 그녀에게 도착한 한 편의 편지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온다.
박정수(40)
올해 나이 마흔. 조각가.
3·15의거 부상자였던 아버지 영준의 유품을 정리하다 흑백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사진의 주인공이 순영임을 확인하고 순영의 동생에게 주소를 물어 독일에 있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의 사진과 수신인이 없는 편지의 주인공이 순영임을 확인하고 전시가 끝난 후 도록을 들고 순영을 찾아가기로 하지만 독일로 가기 직전 순영의 딸이 보낸 편지를 받는다.
기획의도
1960년 3·15의거는 우리 지역의 대표적 항거이자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혁명적 사건임에도 이를 제대로 반추해 본 기억이 없다. 3·15의거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저 빛바랜 역사에 불과할 런지 모른다. 하지만 12명의 희생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그날의 기억은 어떤 상흔으로 남아있을까.
<그대, 가을에 부쳐>는 죽은 자들을 뒤로 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편지 낭독극 형식으로 들려주는 ‘낭독음악극’이다. 죽은 자들 을 대신해 꿈을 꾸었고 사랑을 했고 가족을 꾸렸던, 살아남은 우리들이 죽은 자들을 대신해 그들의 마음을 되짚어 본다.
 
INTRO
M1. 유현의 춤 2악장 (거문고, 장구/ 2분 22초)
무대 양쪽 여자, 남자 낭독자가 자리한 상태에서 공연이 시작된다. 무대 한 쪽 벽면에서는 인트로 음악과 함께 1960년 3월 15일 의거 당시의 흑백사진들이 한 장씩 넘겨지며 과거의 기억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첫 번째. 순영의 편지
지독한 꿈을 꾸었습니다. 베갯잇이 모두 젖도록 울고 또 울었나 봅니다. 한동안 잊은 줄 알았던 그날의 일이 너무도 선명히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둔 공포와 두려움에 치를 떨었습니다.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지 내려앉은 잇몸 사이 피가 고였습니다. 요즘 따라 고국의 아침이 매우 그립습니다.
이곳은 이른 추위가 몰려오는 듯 뼛속 깊은 한기가 느껴지는 가을 입니다. 고국의 가을은, 마산의 가을은 안녕한지요. 저의 우울한 근황으로 편지를 시작하여 혹 심려를 끼쳐드린 건 아닌지 새삼 마음이 쓰입니다.
이역만리 이곳 독일에서 당신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일이 있은 지 몇 해 후 저는 곧장 독일에 왔으니 이곳에 정착한 지는 어느덧 5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저는 아마 이곳에서 생을 마감 하게 되겠지요. 지나온 세월이 참으로 꿈만 같습니다. 제게는 악몽에 가까운 생이었지만 악몽조차 꾸지 못했던 그들을 떠올리면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입니다. 고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늘 뉴스를 챙겨주는 딸이 있어 비교적 훤하답니다. 수백 만 군중이 촛불로서 부정한 정권을 교체하였다는 소식에는 전율하는 듯 온 몸이 떨렸습니다. 총포를 난사하던 폭압적인 정권을 반백년 사이 이처럼 바꿔놓은 민중의 힘은 실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날 우리들도 빈손으로 거리로 나갔지요. 맞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와 나는 그날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당신이 보내준 사진 속 세 사람은 나와 당신의 아버지 그리고 그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유감입니다. 오랜 세월,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괴로워하셨다니 그래서 가시는 길이 더 편안해 보였다는 말이 한동안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 나이 올해 일흔 다섯입니다. 죽음이 익숙한 나이지만 꼭 나이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 세대는 정권에 의해 쉽게 아스러졌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더라도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일찍 당신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면 살아남아줘서 고맙다고, 그 모든 것들을 지고 살아온 세월에서 이제는 자유로워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제 당신 아버지와 나 그리고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당신의 물음에 답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저 동세대를 함께 살아낸 사람들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떨어지는 낙엽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잊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유지를 따르는 길이라 믿습니다.
긴 글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 독일에서 순영.
M2. 오래된 정원 (가야금, 노래/ 6분 40초)
두 번째. 정수의 편지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가을이 다 지나 겨울이 오는 지금에서야 이렇게 답장을 드리게 된 제 게으름을 용서해 주십시오. 한국의 가을은 아시다시피 언제나 너무 짧습니다. 변명하자면 저는 올해 연말, 3년 동안 작업한 작품들을 가지고 작은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작업실에 있는 작품을 고르고 새로운 작품을 추가 로 제작하는 동시에 관객들에게 보낼 리플릿에 들어갈 초대글과 사진들을 추려 놓느라 말 그대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참. 지난번 편지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조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조각을 시작한 지 도 20년이 다 되어 제법 업계에서는 중견작가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자신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은 아닌가 두려운 한 편 설레기도 합니다. 짐작하실지 모르겠지만 전시회는 제게 늘 혼자 하던 작업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하고 공식적인 기회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아, 죄송합니다. 선생님 앞에서 제가 나이 얘길 하다니요.) 전시회 기간 동안 기분이 오락가락하기 일쑤입니다. 남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척 하지만 실은 작은 칭찬에도 기분이 한껏 들떴다가 시큰둥한 반응에는 어쩔 줄 모르는, 또 그걸 의식하는 제 모습에 실망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감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저를 선생님이 보신다면 우스꽝스럽다 욕하실 수도 있겠지요. 이럴 때면 전시 첫 날 전시장을 한 바퀴 휘 둘러보고는 절뚝거리며 뒤돌아서는 걸음에 “밥은 먹고 왔나?”하시며 서둘러 나가시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밥 굶고 산다며 기를 쓰고 말리시던 어 머니와 달리, 의외로 그저 밥은 먹고 사느냐며 저의 길을 묵인해 주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그 시절에는 제게 그렇게 큰 버팀목이 되었던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선생님에 관해서는 마침 저의 작업실을 방문한 선생님의 조카분에 의해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사시면서 큐레이터 일을 하시는, 제 이야기를 전해주셨다는 그 조카분 말입니다. 지난번 편지에서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그날 우연히 방문한 조카분께서 작업실에 있던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의 어머니 즉 선생님의 여동생 되시는 김수정 선생님이라고 하셨거든요.
후에 직접 김수정 선생님을 찾아 정황을 여쭤 보니 사진 속 인물 은 바로 독일에 계신 선생님이시라며 감사하게도 주소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우연치고는 절묘한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작업실에 사진을 가지고 간 것도, 조카분이 방문해 그 사진을 본 것도 모두 우연의 일치였지만 몇 가지 우연이 겹친걸 보니 아마도 선생님과 편지로나마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즈음에야 그날의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희 가족은 아버지가 3·15의거의 보훈대상자라는 것도, 그날의 기억을 평생 붙들고 살아오셨던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절뚝거리는 한 쪽 발도 그날의 상처 때문이라는 걸 그제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왜 저는 아버지의 발에 대해 여쭤보지 않았던 걸까요.
왜 저는 아버지의 상처에 대해 눈 감았던 걸까요.
한동안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라 제가 보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의 인생이 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과 아버지 그리고 또 다른 한 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요. 세 분의 인생과 이야기는 모두 떨어진 낙엽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세 분의 이야기는 현 재진행형입니다. 선생님은 운명처럼 다가와 저와 아버지를 다시 이어주셨습니다. 선생님과 아버지에 관한 어떤 이야기라도 전해 듣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제게 남긴 숙제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무례한 저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겨울의 초입 마산에서 정수 드림.
추신 : 선생님께 부끄럽지만 제 개인전의 도록을 동봉해 보내드립니다. 3·15의거를 주제로 한 저의 최근 작품도 도록에 실려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바라봐주실 런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됩니다. 꾸지람이라도 좋으니 어떤 말씀이라도 해주신다면 달게 듣겠습니다. 거듭 건강하십시오.
M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 (해금, 신디 / 4분 40초)
세 번째. 순영의 편지
오랫동안 준비한 전시회는 잘 치렀는지 궁금합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근처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아직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황량한 숲이지만 곧 새 옷을 꺼내 입겠지요. 겨우내 웅크렸던 숲의 모든 생명체들이 제각각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보는 일은 이 나이가 되어도 늘 새롭기만 합니다. 이곳 유럽은 한국보다 봄이 느리게 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봄은 더욱 간절히 기다려지는 계절입니다. 상처받은 새처럼 비행기에 몸을 싣고 꽁꽁 언 베를린에 도착했던 1967년 3월에 나는 고국의 겨울조차 내겐 너무도 따뜻했던 계절이었음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도착하자마자 다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이 되었을까요. 한때 문학소녀를 자처했던 저는 여고시절 외국 작가의 시를 즐겨 외웠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엘리엇의 시구를 이곳에 와 서야 이해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유럽은 4월이 되어서야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그래 서 유럽인들에게 4월은 그토록 잔인한 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4월이 잔인한 달인 것은 비단 유럽만의 일은 아니겠지요. 몇 년 전 일어난 불의의 사고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4월은 끔찍하리만치 잔인하고 아픈 달일 것입니다. 딸에게 전해 들으니 배를 탄 아이 들의 대다수가 18세의 고등학생이었다더군요. 아이들의 억울함을 무엇으로 풀어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의 가족을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바로 코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친구들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요.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이, 살아남은 아이들의 마음이 어떨지 나는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을 뿐입니다.
아버지와 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하셨지요. 그것이 당신에게 남 겨진 숙제처럼 여겨진다고요.
그때 우리 나이도 그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어른들이 가장 좋을 때라고 말하는 18살. 꽃띠였지요. 1960년 3월 15일 그 일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말입니다. 제가 다니던 여고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유독 문학소녀가 많았던 이유도 아마 등하교길 어김없이 마주 하게 되는 눈이 시릴 만큼 푸른 바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월 15일 당신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날 이승만의 부정선거는 도를 지나쳤고 민주당은 선거불참을 선언했습니다. 마산 시내는 아침부터 선거구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 은 실랑이와 부정선거의 부당함에 항의하는 사람들로 들썩였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와 친구들은 우리 학교 학생들을 거리로 불러내기 위해 학교 근처에서 더욱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에 질세라 우리들도 우르르 밖으로 나가 부정선거를 규탄했습니다.
그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거리에서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오랜 바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비명이었습니다. 절규였습니다. 우리는 그날 진정 한 마음이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시청으로 향하는 우리들에게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시청근처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모든 불이 꺼지고 도시 전체가 암흑에 잠긴 듯 했습니다.
저는 당신 아버지를 포함한 주변 친구들에게 시청 앞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자고 했고 우리들은 남아있는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밀려드는 사람들이 두려웠는지 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탕탕탕… 탕탕탕… 사람들은 정신없이 흩어졌고 드문드문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그가 제 앞에 쓰러졌고 끈적하고 뜨거운 무언가 가 그의 몸에서 그치지 않고 흘러나왔습니다. 탕탕탕… 총포는 계속 되었고 저는 멍하니 거리에서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를 지켜준 건 당신의 아버지입니다. 그때 오른쪽 발뒤꿈치에 총을 맞은 당신의 아버지가 잡아끌지 않았다면 나는 그와 함께 영 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겠지요. 그 일이 있고난 후 나는 부끄러운 방관자인채로 독일로 도망쳐 오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끝까지 지켜주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을, 그 리고 고국을 말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이제 조 금 지친 몸을 뉘여야겠습니다.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 독일에서 순영
추신 : 당신의 작품을 도록으로 보았습니다.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었지만 딸은 직접 전시회에 가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당신의 작품이 자코메티의 작품과 닮았다나요. 마지막 장에 저의 이름이 붙은 작품만큼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더군요. 앙상한 뼈대에 두 손을 모은 채 하얀 꽃을 들고 서있는 내 모습에서 나는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M4. 침향무 (가야금, 장구/ 8분 30초)
네 번째. 정수의 편지
염려해주신 덕분에 개인전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뜻하지 않은 언론의 조명과 많은 이들의 호평에 몸 둘 바를 몰랐던 시간이었습니다 긴장한 탓인지 개인전을 끝내자마자 사흘 밤낮을 자버렸습니다. 꿈 속에서 아버지와 당신과 그가 웃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해주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아버지 가 이곳의 사람들과 이곳 선생님의 고국을 지켜준 고마운 사람이라 는 말이 제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그리고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가슴과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있는 힘껏 두 분을 안아드렸을 것입니다.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저 손을 맞잡고 얼굴을 부비고 따듯하게 서로를 안아주는 일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지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동봉했던 전시회 도록을 보셨다니 감사드립니다.
제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지요. 예술작품은 이해하기 보다는 느끼는 것일 텐데 제 작품에 아무런 감흥이 없으셨다니 역시 저는 아직 멀었나보다 생각합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선생님의 이름을 붙인 조각품 <순영>을 보고 눈물을 쏟으셨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각적으로 터져 나오는 울음은 작품이 이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범주에서 받아들여졌다는 뜻일 테니까요. 제가 이제까지 들어본 감상평 중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저 역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의미로 작품 <순영>을 선생님께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언젠가는 선생님을 직접 뵙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던 차였는데 때마침 프랑스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작품 전 시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오는 6월 22일 전시에 참여한 후 다음날 23일 선생님이 계신 독일로 가보려 합니다. 직접 뵙고 편지로 못다 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뵙자마자 있는 힘껏 안아 드리기부터 할테니 미리 놀라지 마시라 말씀드립니다.
작품 <순영> 말고도 전해드릴 편지 한 통이 더 있습니다. 수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던 편지가 이제야 주인을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마산에서 정수 드림.
M5. 사랑 그 거즛말이 (신디, 해금, 노래/ 4분)
다섯 번째, 줄리아의 편지
박정수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줄리아에요. 편지를 주고받으신 김순영 선생님이 저의 엄마입니다. 엄마를 만나러 독일로 오신 다는 편지를 읽고 급히 답장을 드려요. 저희 엄마는 지난달 영면에 드셨어요. 엄마는 말기 유방암 환자셨고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여서 손쓰기가 힘들었어요. 그래도 의사가 말했던 3개월보다 훨씬 긴 1년을 살다 가셨으니 그만큼 버텨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에요. 엄마가 그만큼 버틸 수 있었던 데는 선생님의 역할이 컸어요.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으셨지만 은근히 선생님의 편지를 기다리셨거든요. 엄마는 한국을 잊고 싶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그리워하셨어요. 제게 늘 한국 소식을 물어 보셨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정작 한국에 들어갈 기회가 생길 때는 단박에 거절하셨어요. 아마 오랜 세월 자신을 괴롭혀온 그날의 기억과 마주하기 두려우셨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엄마는 저희 앞에서 늘 웃는 얼굴을 보여주셨어요. 저는 엄마가 언제나 밝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데 어느 날 학교를 일찍 마치고 집에 들어가다가 집안에 있는 엄마를 놀래 주려고 집밖에서 몰래 집안을 들여다보다 엄마의 다른 모습을 보고 말았어요. 제가 8살 때였는데 엄마는 식탁 옆 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엄마의 표정을 지금껏 잊어본 적이 없어요. 텅 비어버린 엄마의 눈동자는 현실에 없는 무언가를 쫓고 있는 듯했거든요. 사실 엄마는 간신이 버티고 있는 거였어요. 그야말로 간신이 말이에요. 그날 이후 어린 저는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어딘가 로 가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한동안 학교 외에는 집밖 을 나서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한국에서의 그 사건 이후 텅 비어 버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특히 사진 속 베레모를 쓴 남자가 엄마의 첫사랑이었고 그분이 죽어가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아야 했으니 더욱 그랬겠지요.
선생님의 아버지와 저의 어머니, 그리고 그분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고 꿈이나 사랑, 행복과 같은 일상적 감정과 행위들을 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깊은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아남은 자의 무거운 짐을 끝까지 지고 갔던 두 분과 역사적 현장에서 뜨겁게 산화해버린 한 남자의 인생을 이 흑 백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테지요.
하지만 다시 시간을 돌린다 해도 세 분은 같은 선택을 하셨을 거 라 믿어요. 선생님이 보내준 도록에 실린 작품 <순영>을 보고 엄마 는 한평생 참아왔던 눈물을 쏟으셨어요. 엄마는 그제야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으셨고 편안히 잠드실 수 있었지요.
모두가 선생님 덕분입니다. 엄마는 안계시지만 독일에 오신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선생님을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독일에서 줄리아가
M6. 저 멀리 지평선
남자가 아버지, 영준의 편지를 읽는다.
여섯 번째, 영준의 편지
그대, 가을에 부쳐(존 키츠의 시 <가을에 부쳐>)
태양과 공모하여 초가집 처마를 휘감은 포도나무들을 열매로 가득 채우고 축복해주며 이끼 낀 오두막집 나무들을 사과로 휘어지게 하고 과일 하나하나 속속들이 무르익게 하고 박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개암 열매 깍지를 달콤한 과육으로 살찌우고, 꿀벌들을 위해 늦게 피는 꽃들을 더욱 더 피어나게 한다. 여름이 이미 끈적끈적한 벌집들을 흘러넘치게 하였기에 꿀벌들은 따스한 날들이 결코 그 치지 않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입니다.
- 마산에서 영준 
M6. 사랑 그 거즛말이 (신디, 해금, 노래/ 4분)
: 구음으로 하거나 다른 악기들이 조금씩 다 참여하는 걸로… 마지막 엔딩곡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