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빠스리좀 개관 기념전
재불작가 한홍수 개인전
'세상의 기원'
작가 : 한홍수
기간 : 2015년 12월 23일 ~ 2016년 2월 23일
오프닝 : 2015년 12월 23일 오후6시
장소 : 갤러리리좀 3층
한홍수
1959 전남 해남 출생
1980-86 목포대학 미술학과 졸업
1992 도불
프랑스 베르시유 미술학교 수학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수학
[개인전]
2015 바움갤러리 개인전
<유네스코 70주년 초대전, 기원의 뒷면>, 프랑스, 파리
2010 Gallerie 89, 파리
2000 Kulturforum willch, 독일
1999 Espace Paul Delouvrier FIAP, 파리
[단체전]
2015 “한가람 미술관 단체전”
<130주년 한불수교 및 파리국제예술공동체 50주년 기념 소나무 전시 ‘감각교류’>, Cite internationale des Arts.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70주년 2인 초대전, 제 3의 현실> 왕두, 한홍수, 프랑스, 파리
2014 <소나무, 그의 영혼은 어디에?> Cite internationale des Arts, 파리
<소나무 ART-MONIE #2>, LA 한국문화원, 미국
비평글
-심은록 (SIM Eunlog 미술비평가, 감신대 객원교수)
'<OwB>와 <BwO>'
한홍수의 최근 작품 <지젝에 따른 OwB (신체 없는 기관)>은 첫 눈에볼 때,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거대한 팔루스(- phallus)를 정밀하게 그려 놓은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다. 작년프랑스에서 논란 끝에 파괴되고 결국 철거되었던 폴 맥카시의 <그린트리>는 오히려 점잖다. 그런데 <OwB>를 가만히 보면 사람이 허리를거의 180도로 꺾어 상반신과 하반신이 겹쳐진 모습이다. 고대거석문화에서의 팔루스처럼, 신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적 기관이 되었다. 또 다른 연작 <들뢰즈에 의한 BwO (기관 없는 신체)>는 인체의엑스레이 사진을 보는 듯하다. 몸의 전체적인 형태나 뼈의 구조는 그대로 보이는데, 내장 혹은 기관이 보여야 할 장소는 텅 비어 있다. 언뜻 보면 몸 자체가 커다란 생식기 같기도, 투명한 단세포 생물같기도, 오브제나 풍경의 일부 같기도 하다. 기관들 간의 위계질서나 지정된 역할도 사라진다. 물론 그렇다고 한홍수의 작품이 프랜시스 베이컨의 <루시안 프로이트의 초상화를 위한 세 연구>나 <조지다이어의 초상화를 위한 세 연구> (들뢰즈적 “기관 없는 신체”의 대표적인 사례)처럼 그렇게 압도적이거나 강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매끈하고, 애매모호하며,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 허약하다. 그렇기에 더 디지털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세상의 기원'
전시실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한홍수의 연작 <기원의 뒷면>을 보며 혼동스러워 한다. 분명 사람의 둔부를 그린 것 같은데, 거기에 십자가가 연상되는 주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엉덩이에 잡힌 주름에서 십자가가 드러나고 있다. 둔부에서 투영되는 십자가는 성(性)과
성(聖)의 조화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원에 얽힌 종교적 개입을 빗댄 것인지 알 수 없다. 미술사적으로 <기원>과 관련된 작품들이 많다.
쿠르베의 유명한 작품 <세상의 기원>이 있고, 오를랑은 이를 남성버전으로 <전쟁의 기원>으로 재해석했다. 뒤샹의 마지막 작품
<주어진 것 1.램프, 2.폭포…> 에 등장하는 여성은 불, 물, 땅, 공기라는 근원적 요소와 함께 또 다른 기원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한홍수는 이 모든 기원들을 아주 간단하게 뒤엎어 버렸다. 그는 <기원의 뒷면>(둔부)를 그린다. 그 결과, 쿠르베, 오를랑, 뒤샹은 각각 신체의
앞부분(여성성과 남성성의 상징)을 그렸기에, ‘기원의 앞면’을 그린 셈이 된다.
한홍수 작가는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그의 작품에 ‘어정쩡함’과‘불분명함’을 첨가한다. 그의 회화는 모두 수 없이 겹쳐지는 중첩된 붓질에 의해 탄생된다. 이처럼 수백 번이나 겹쳐지는 데도, 그림은 점점 얇아지고, 점점 더 투명해져서 화면의 밑바닥이 보일 듯하다. 동시에
오브제의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선도 점점 더 흐릿해진다. 이러한 ‘붓질의 중첩’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계선이
흐릿해지도록 수 없이 붓질을 중첩시키는 이유는, 이는 뭔가 애매해질 때 감성이 이동하기 때문이며, 또한 수많은 반복을 하면서 그 반복을 통해 정화되는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흐린 감성의 카타르시스 무의식 뒤태'
인체의 뒷면이다. 구부리거나 조금은 뒤틀린 또 무엇에 홀린 듯 정지한 직립자세다.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은 흐릿하고 모호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여운을 남기는 오리엔탈 어법 혹은 산 너머 산 그 겹겹의 완만한 능선처럼 부드러운 곡선은 굴곡진 생의 고비를 넘어 온 무심(無心)마냥 평평하다.
작가는 질감이 살아있는 유화캔버스 천 자체부터 매끄럽게 다시 만든 후 그 위에 마치 구도의 수련처럼 부드러운 붓으로 색채를 포개고 또 그 다시 쌓아올리는 반복을 이어간다. 텔레비전의 매끈한 화면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그는 현대성을 수용해 내는 방식을 선택한 것인데 화면은 맑고 투명하며 반드럽지만 따뜻한 온기가 배어 나온다.
화백은 자신의 작업스타일을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나처럼…"이라고 말했다. 이미지가 전달하는 사라진 신체모습처럼 그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저서 <신체 없는 기관(Organs Without Bodies)>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라고 토로했다.
이 두 의미를 다시 새겨보면 인간의 몸 그 본바탕에 주목하고 있는 작가의식을 짐작 할 수 있다. 에로스와 존재론적 관계성의 메타포가 느껴지는 화면에선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한병철 교수의 저서 <에로스의 종말(AGONIE DES EROS)>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에로스는 그 보편적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는다.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에로스는 도래 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 준다."
한편 파리근교에서 '몸과 기원'에 대한 작업에 천착하고 있는 그는 지난 9월 프랑스 파리에서 AIPU(유네스코직원국제협회) 회원들이 초대한 작가로서 각국 관람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유네스코(UNESCO) 70주년기념-기원의 뒷면'초대전을 성황리에 마치고 이번에 방한해 국내 애호가들에게 그의 작품을 선보이는 의미가 크다 하겠다.
인터뷰
심은록 : 작가님의 성격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요 ?
한홍수 : 제 와이프가 저를 « 한 입으로 두말 하는 애매한 사람 »이라고 해요. 아마 제가 감각(자연)에 충실하기 때문에 그런것 같아요.
심은록 : 의외의 사실인데요. 작가님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작가님이 한번 말하면 꼭 지키는 사람이라고들 하던데요.
한홍수 : 그건 와이프는 내 반쪽이니까 내 속에 있는 것을 거르지 않고 다 말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더 큰 문제는 사실 한 입으로 두 말만 하면 괜찮은데, 작업을 할 때는 혼자서 한 입으로 수 백 가지 다른 말을 해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그래서 그림도 한 캔버스 위에 아주 얇게 수 십 번 겹쳐 그리게 되요. 이렇게도 그렸다가 저렇게도 그리고…
심은록 : 그렇게 수십 번을 겹쳐 그리는데도 그림이 아주 얇게 느껴집니다. 거의 투명할 정도로요. 그림은 어떤 과정으로 그리시나요?
한홍수 : 캔버스를 사서 벽에 미장하듯이 반질반질하게, 아크릴 흰색 물감을 10번 정도 새손 [미장도구 사용]으로 골고루 발라요. 그렇게 하면서 천의 질감을 없애 버려요. 그러면 캔버스가 반짝이는 아크릴 판 같이 되어요. 이렇게 준비 작업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에요. 아주 여러 번 그려도 아주 엷고 얇게 그리기에 가볍고 빤질빤질한 느낌이 들어요. 저한테는 색깔을 엷게 그리는 것이 일종의 현대의 물질성의 가벼운 느낌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은록 : 시간을 들여서 명료하게 하기 보다는 이렇게 흐릿하고 애매하게 하시는 이유가 있으시나요 ?
한홍수 : 그게 제 성격과도 맞는 것 같고, 명확하지 않는 만큼 그만큼 제 그림을 보는 사람과 교감이 되는 것 같아서요. 예를 들어, 우리가 너무 설명이 잘된 구상을 볼 때보다, 추상을 볼 때 더 많은 교감을 나눌 수 있잖아요. 즉, 비록 내가 그린 그림이지만, 내 이야기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면서 모나리자가 왜 저런 미소를 지을까, 왜 다빈치는 저렇게 신비로운 그림을 그렸을까하고 다빈치의 마음을 읽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마크 로스코의 추상을 보면 처음에는 로스코가 왜 저렇게 붉은 색을 혹은 검은 색을 그렸을까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보는 사람의 감정을 그 그림 속에 투사하게 되어요. 바로 이 부분이 저는 좋은 것 같아요. 그러나 너무 모호한 것도 싫어서 어느 정도 구상이 있으면서 약간의 추상처럼 애매한 그런 것이 좋습니다. 내 이야기도 하면서 또 보는 자의 이야기도 함께 듣는, 그렇게 서로 ‘대화’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심은록 : 하지만 애매함은 모두가 피하고 싶은 감정 아닌가요 ?
한홍수 : 사실 한국 사람들은 좀 애매하게 말하잖아요. 언어 자체가 주어를 주로 생략하니까 1인칭을 말하는지, 2인칭을 말하는지 모를 때가 많고, 또 저도 흔히 그러는데, « 같아요 »라는 말로 많이 끝나요. 물론 일부에서는 이러한 자세가 결단력이 없는 자세라고 나쁘다고 하지만, 좋은 면을 보면,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상대의 의견에 따라 내 의견을 수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심은록 : 언어적으로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는데, 그림과 관련해서는 어떤가요 ?
한홍수 : 저는 뭔가 애매할 때는 감성이 이동하는 것 같아요. 명료할 때는 그것에 안주하는 것 같고요. 또한 그림을 수십 번 겹쳐서 그리면서 열심히 그릴수록 점점 더 애매모호 해지는데, 흥미로운 것은, 나는 분명히 신체의 일부를 열심히 그렸을 뿐인데, 이 신체가 때로는 커다란 남성의 상징이 되기도, 어떤 오브제가 되기도, 혹은 자연의 일부 같아 지기도 하는 거에요. 내 그림이 애매해 질수록 외부에 가까워 진다는 이야기에요.
심은록 : 한 캔버스에서 같은 형태를 수없이 반복하시는데, 이처럼 반복적인 일을 계속하다 보면 지루하다거나 허무하지는 않으신가요 ?
한홍수 : 침잠하는 색이나 가라 않는 톤으로 반복적인 붓질을 계속하다 보면, 왠지 제가 정화되는 느낌이 들어요. 반대로 밝은 톤으로 반복적인 붓질을 계속하면 왠지 제가 떠오르는 듯한, 업(up)되는 그런 느낌이 들고요.
심은록 : 데생, 특히 크로키를 그리실 때는 일필휘지로 자신 있고 용감하게 그리시잖아요.
한홍수 : 그것은 그 순간 만을 파악한 것이지요. 제가 그림을 그릴 때도 한 층 혹은 한 레이어를 그렇게 그리는 거에요. 그런데, 그림은 아무래도 오랜 시간을 그려야 하니까, 그러한 크로키가 수십 장이 한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것이지요.
심은록 : 아. 그래서 작가님의 이전 작품을 보면, 시간에 따라 사람이 움직이는 듯한 그림을 그리신 거군요.
한홍수 : 그래요. 그래서 이전의 작품에는 산이 겹쳐진 듯, 파도가 계속 반복 되는 듯한 그림을 그리고, 또한 인물도 마치 시간에 따라 움직임이 있는 것처럼 그렸습니다. 그때는 이러한 움직임을 시간적으로 일렬로 나열하듯 그린 셈이라면, 이제는 이를 한 곳에 몰아 그리는 셈이지요. 사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두 움직임이 있으니 엄밀하게 보면 흐릿한 것이 사실이고, 또한 그렇게 반복되어 움직이는 것에 영원성의 느낌도 더 느껴지잖아요.
심은록 : 작가님의 최근 작품을 보면 말 그대로 살과 뼈만 보여요. 피부도 보이고 살도 보이고 뼈도 어른어른 보이는데, 기관들이 보이지 않아요. 혹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를 표현하신 건가요 ?
한홍수 : 제가 프란시스 베이컨을 좋아하긴 하는데, 글쎄요[베이컨의 작품들은 들뢰즈의 «≪ 기관 없는 신체 »≫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그런데 한국어 표현에 « 애간장이 탄다 »라는 말이 있잖아요. 혹은 « 오장육부가 녹았다 »라는 말이 있듯이, 살면서 좋은 일로 혹은 슬픈 일로 점점 더 기관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관이라는 것이 평상시에는[건강할 때는] 고맙게도 조용히 있어서,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잖아요. 하지만, 뼈는 가끔 느껴지잖아요. 그리고 사실 우리가 어떤 무엇을 보거나 먹거나 만날 때, 어떤 기관이 먼저 혹은 나중에 관여해야 하는지, 그런 위계 관계라든가 구별을 하지 않잖아요.
심은록 : 서구식이 아니라 완전히 한국식 «기관 없는 신체 »네요. 하지만 그래도 기관의 위계관계가 없다거나, 구별 없이 한 기관이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언급은 상당히 들뢰즈 식이라고 느껴집니다. 아틀리에에 크로키나 데생 한 것이 상당히 많으신데요. 언제 하시는 거에요 ?
한홍수 :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빠짐없이 누드 데생 아틀리에에 가서 스케치를 해요.
심은록 : 처음에 파리 오셔서 초상화를 그렸다고 들었는데, 그때 원없이 인물데생을 하셨을 텐데요. 인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한홍수 : 처음부터 인물에 관심이 많았어요. 내 자화상도 그리고, 언급하셨듯이 아르바이트 하면서 초상화를 그렸어요. 관광객들 초상화를 그리다가 왕두를 만나게 된 거지요. 그러니 벌써 20년 넘게 우정을 쌓고 있습니다. 제가 중국작가들과 어울리면서 알게 된 것은, 우리의 미술 교육에 있어서 석고데생에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석고는 살아있지 않은 오브제 일 뿐이에요. 그런데, 중국은 처음부터 실제 모델을 가지고 인물을 그리니까 살아있는 것처럼 잘 그려요. 우리는 석고상처럼 예쁘고 볼륨있게는 그리는데 왠지 살아있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심은록 : 언제 도불하시고, 도불 이유는요 ?
한홍수 : 1992년 3월에 파리에 도착했어요. 한국을 떠날 때는 겨울의 자락이 남아 있어서 아직 황량했는데, 파리에 도착하니 잔디도 파릇 파릇하고 꽃도 벌써 피어서 참 이상적이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도불한 이유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듯이 오롯이 작업하고 싶어 왔습니다.
심은록 : ‘화가와 그림’, 혹은 ‘작가의 삶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 지요 ?
한홍수 : <달마야 놀자>라는 한국 영화가 있는데, 거기서 큰스님이 깡패집단들에게 «≪ 깨어진 독에 물을 채우라 »≫라고 해요. 그러자 깡패 재규가 깨진 독을 연못에 빠뜨려요. 자동적으로 독에 물을 채워진거지요. 저도 이처럼 내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인터뷰 2014년 9월, 2015년 7월, 작가 아틀리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