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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리좀 영화교실의 첫 강의!
이상훈 프로그래머님의 ‘Ⅰ 한국 영화사 – 한국 영화사 개관’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한국영화 시작부터 한국전쟁까지의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1.활동사진과 극장가 형성
2.식민지 대중문화와 무성영화
3.유성영화와 군국주의
4.해방과 한국전쟁
한국의 영화사는 시대의 인식과 접근방법, 또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관점과 시대적 사실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영화사는 한국 사회에 대한 기록이며, 영화를 생산하고 소비한 그 시대의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심리가 조합되어 있습니다.
영화라는 매체는 조선말에 서양 문물과 함께 한반도에 도착했고, 그 이후에 한국 영화는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1903년에 조선에서 최초로 상영되었습니다. ‘동대문 한성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국내외 절경을 담은 활동사진(이때는 활동사진으로 불렸음)을 상영하였고, 관람시간은 일요일과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한 저녁 8~10시까지, 입장료는 동화 10전이었습니다.
19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영화가 확산되면서 극장가 형성이 시작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영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영화 관람이 보편화되었고, 대중들에게 기존 연극과 다른 방식의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영화적 영상은 <의리적 구토(김도산, 1919)>입니다. <의리적 구토>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의 영화가 아닌, 연쇄극(kino-drama: 연극 공연 중에 영화를 상영하는 극)이었습니다. 연쇄극은 불완전한 형식의 영화였지만, 한국 영화의 기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절에는 전통 연극을 구파라고 하면서 신파(새로운 물결)라는 새로운 극형식이 인기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신파를 오히려 예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완전한 극영화는 <월하의 맹세(윤백남, 1923)>입니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에 저축장려 목적으로 제작된 계몽영화입니다. 최초의 스타 배우인 이월화가 데뷔하였으며, 각본과 감독, 배우와 스태프 등이 조선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은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맡았고, 촬영과 필름 현상은 일본인이 작업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여배우가 출연한 영화였습니다. 이전의 연쇄극에서는 남자 배우에게 여자 분장을 시켜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영화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기간이었습니다. 정치적 격변기 시절에 기록영화의 목적으로 군, 관, 경 중심의 뉴스영화, 기록영화, 문화영화 등이 다수 제작되었습니다.
1954년 4월부터는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가 시행되었고, <춘향전(이규환, 1955)>, <자유부인(한형모, 1956)>이 개봉 및 성공하면서 영화 산업의 기틀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한국영화는 형식적 완결성을 갖추면서 이야기를 중심에 둔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의 스타일로 안착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한국 영화의 개관과 이와 관련된 현대사의 흐름에 대해 영화 시청과 이론학습, 그리고 영화사 초기에 일어났던 다양한 뒷이야기와 함께 알아보았습니다.
100년이 넘는 한국영화 역사에 대하여 수업하는 곳이 드물고, 게다가 무성영화 시절부터 다루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니 이번 수업은 한국 영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리좀영화교실 2회차 강의는,
6월 2일 수요일 (14시~17시) 에스빠스리좀 3층에서
전찬일 영화평론가님의 ‘Ⅳ 영화 이론 – 영화 이론 입문 : 작가주의 이론’ 이 진행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