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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관리자작성일 21-06-15 16:03


<씨네아트리좀비단> 홍은혜님의 영화리뷰입니다.
'씨네아트리좀비단'이란 씨네아트리좀 영화 리뷰단 입니다.
씨네아트리좀과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분들께서 제공해주신 소중한 리뷰이며
앞으로 업로드 될 리뷰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애플



줄거리

당신을 사로잡을 가장 특별한 여운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 유행병에 걸린 ‘알리스’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억은 이름도 집 주소도 아닌 한 입 베어 문 사과의 맛. 며칠이 지나도 그를 찾아오는 가족이 나타나지 않자 무연고 환자로 분류된 ‘알리스’에게 병원에서는 새로운 경험들로 기억을 만들어내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리스’는 자신처럼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안나’를 만난다.
괜찮아요, 다들 잊고 사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 <애플>

매력적인 감독과 제작자의 만남
올해 씨네아트리좀에서도 재개봉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랍스터(2015)>, 그리고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블루 자스민(2013)>과 <캐롤(2015)>은 모두 내가 인생작으로 꼽는 몇 안 되는 영화들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언급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애플(2020)>이다. 이 영화에는 ‘케이트 블란쳇이 선사하는 단 하나의 마스터피스’, 그리고 ‘제2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실제로 이 영화를 통해 장편 데뷔를 한 감독 크리스토스 니코우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송곳니(2009)>의 조감독 출신이다. 아래 영화 포스터에서도 <애플>은 본 영화의 감독보다 제작자인 케이트 블란쳇과 요르고스 란티모스를 강조하고 있다. 케이트 블란쳇은 <애플>뿐만 아니라 <캐롤>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두 작품 모두 뛰어난 영상미와 여운을 주는 스토리를 자랑한다. <캐롤>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애플>은 ‘기억’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기억을 잃은 한 남자
영화는 ‘쿵, 쿵’하는 소리로 시작한다. 주인공 알리스가 벽에 머리를 찧는 소리다. 이후 멍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알리스를 비추며, ‘단기 기억상실증’이 유행하고 있다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간다. 이렇듯 기억 상실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 시대에 사는 알리스는 꽃을 사 들고 어딘가로 향하는 길에 버스에서 잠이 들고 만다. 잠에서 깬 그는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의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던 그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들을 위한 병원 시설로 이송된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알리스를 찾는 이는 없다. 사과의 새콤달콤한 맛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알리스에게 병원은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해당 프로그램은 의료진이 제공하는 녹음 테이프에 담긴 지시를 환자가 수행하고, 그 과정을 폴라로이드로 찍어 기록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이 제안한 ‘자전거 타기’ 임무를 수행하는 알리스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 알리스는 ‘자전거 타기’부터 ‘코스프레하기’,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기’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기록한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기록을 하는 데 컴퓨터나 휴대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가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세트테이프, 폴라로이드 카메라, 앨범 등 아날로그 방식으로 모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심지어 영화 화면의 비율도 과거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연상케 하는 4:3의 화면비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관객들이 영화의 시대 배경을 가늠하기 어렵게 하려는 감독의 의지를 보여준다.
한편, 영화는 알리스가 안나를 만나기 전과 후로 크게 나뉜다. 알리스는 영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을 관람하는 임무 수행을 위해 찾은 영화관에서 자신처럼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안나를 만난다. 이후 두 사람은 각자의 임무를 함께 수행하며 가까워진다. 예컨대, ‘운전하기’ 미션을 받은 안나는 알리스와 함께 드라이브를 한다. 이내 안나가 모는 차는 나무를 들이 받고, 알리스는 그런 안나의 모습을 폴라로이드로 찍는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함께 수영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함께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수행하며 가까워지는 안나와 알리스


하지만 머지않아 알리스는 안나가 그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한 것들이 실은 병원으로부터 주어진 과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알리스는 안나가 미션 수행을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안나를 만나는 것을 피한다. 이후 혼자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알리스는 죽음을 앞둔 노인을 만난다. 그는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자신의 아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과연 정말로 ‘기억을 잃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어쩌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래서 모든 것을 잊고 싶은 한 남자
위에서 언급한 장면 외에도, 알리스가 사실은 기억을 잃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다소 등장한다. 그는 아내와 함께 살던 곳의 이웃집 개 이름은 물론, 스프나 빵을 만드는 법을 기억한다. ‘징글벨’과 ‘백조의 호수’를 묻는 병원에서의 테스트는 모조리 틀리지만, 안나와 드라이브를 하던 중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Sealed with a Kiss’라는 노래의 가사는 흥얼거린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곧장 자신이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 열쇠도 없이 문을 연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벽에 머리를 찧고 있었던 주인공을 떠올리며 추측해본다. 어쩌면, 아내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아내와의 기억과 아내를 상실한 아픔을 잊기 위해 일부러 시설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사과를 사는 알리스.
영화 속에는 알리스가 사과를 먹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은 ‘사과의 맛’이다. 실제 영화에는 알리스가 사과를 먹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병원으로 처음 이송된 날에도,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서도 알리스는 매번 ‘사과’를 베어 문다. 딱 한 차례, 알리스가 사과 대신 오렌지를 택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일 가게 주인의 ‘사과가 기억력에 좋다’는 말을 듣고 나서다. 알리스는 집었던 모든 사과를 내려놓고 오렌지를 산다. 마치 그 어떤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이다. 이는 영화 마지막에 덤덤하게 사과를 먹는 주인공의 모습과는 대조된다. 안나와의 관계에 실패하고, 노인의 죽음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알리스는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당당히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노인의 죽음 이후, 알리스는 병원에서 제공한 집을 떠나 원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또, 꽃을 사들고 아내의 무덤에 찾아간다. 이는 영화의 도입부와 수미상관을 이루는데, 아내와의 모든 기억을 잊고 싶었던 그가 ‘기억력 향상에 좋은’ 사과를 베어 무는 장면은 알리스가 아내를 기억하기로 결심했음을 유추해보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장면이 등장한다. 알리스가 찾아간 아내의 묘지명에는 ‘안나’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안나’의 정체와 <애플>의 해석
알리스의 아내였던 안나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안나와 동일 인물일까? 영화는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안나와의 기억을 파편적으로 제시한다. 이를테면 병원에서 제시한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위해 함께 드라이브를 하던 도중 나무에 들이받은 안나를 알리스가 찍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알리스 혼자 나무를 들이받은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고(그래서 두 안나가 동명이인이라고) 가정하면, 안나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난 이후 주인공이 안나가 수행했던 미션을 자신도 수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안나가 죽은 아내와 동일인물이라고 가정하면 죽은 아내를 추억하며 아내의 죽음을 마주보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직선적 흐름을 취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내의 묘지를 찾아가던 주인공이 기억을 상실해(혹은 상실했다고 거짓 연기를 하며) 병원 시설에 수용된다. 그곳에서 제안하던 프로그램을 수행하며 만난 안나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안나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실망한 주인공은 안나와의 만남을 피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죽은 아내를 기억해 낸(혹은 죽은 아내와의 추억을 마주하기로 결심한) 주인공은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사과를 베어 물며, 그는 모든 기억을 되찾는다. 하지만 프로그램에서 만난 안나가 만약 죽은 아내라면, 영화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영화 속 묘사된 사건들은 뒤죽박죽 엉켜 버리고, 따라서 이 영화는 한 번만 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혼자 운전하다 나무를 들이받은 알리스.
이전에 안나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던 장면과 대조된다.


‘기억’과 ‘상실’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만큼, 그리고 주인공의 ‘기억 상실’이 정말인지에 대해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 않은 터라 영화 <애플>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알리스가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아픔을 잊기 위해 기억 상실을 연기했다고 본다. 또, 그 과정에서 안나를 만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다 실망하고 다시 아내의 죽음을 마주보기로 결심했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죽음을 직면하는 것은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베어 물며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이다. 물론, 프로그램에서 만난 안나가 죽은 아내와 동일 인물이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해석한 관객들도 더러 있다. 하여, <애플>은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영화다.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곱씹어 봐야 하는 그런 작품. '당신을 사로잡을 가장 특별한 여운'이라는 영화의 카피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기억과 상실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기억 하나쯤은 있다. 저명한 철학자 니체는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고도 말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도 인용된 유명한 구절이다.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다면, 후회한다고 없었던 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망각은 결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한다. <이터널 선샤인> 속 두 주인공은 나를 아프게 하는 상대를 잊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기억을 지웠음에도 결국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애플>에서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아픔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기억 상실을 연기했던 주인공도 결국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아내의 상실을 대면하기로 한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의 입을 빌리자면, “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정체성을 잃게 되는데, 우리가 정체성을 지키면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즉,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울삼아 앞으로 나아갈 지혜를 얻어야 한다. 감독은 “영화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기억의 산물이라면 슬픈 기억을 어떻게 다루면서 나아갈 수 있는지와 연결돼 있다”고도 덧붙였다. 우리는 슬픔, 아픔, 상실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한다. 때로 ‘잊지 않는 것(기억하는 것)’은 ‘잊는 것(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 잊지 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베어 물며.


 

- 씨네아트리좀비단 홍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