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HOME > 씨네아트리좀 > 영화리뷰


<벌새> 누군가 나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다면... 한 소녀의 성장을 통해 본 시대의 야만과 폭력성관리자작성일 20-06-21 00:00



<벌새>
누군가 나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다면...
한 소녀의 성장을 통해 본 시대의 야만과 폭력성 

 

<벌새 (2018)> 줄거리
나는 이 세계가 궁금했다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






 
제 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23회 부산국제영화제 등
2018년을 화려하게 수놓은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독립영화.



나의 마음을 알아줄 이 그 어디에 있는가?(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이 영화는 한 소녀의 방황과 좌절, 그리고 성장을 다룬 성장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은희는 수많은 주인공이 그렇듯 이제 변화해야만 하는 시기의 위태로운 소녀다.
이제 어른이고 싶지만 아직 트레블링을 타는 걸 좋아하는, 그 간극의 한가운데 서있는 소녀.
​은희란 주인공의 욕망은 단순하다. 바로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 하지만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아버지는 떡집 일에 파묻혀 살며, 엄마는 그런 아버질 대신해 가게와 집안일에 항상 지쳐있다.
오빠는 서울대에 가야 한단 압박에 동생인 은희에게 너무나 폭력적이며,
언니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은희를 챙길 여유조차 없다.
남자친구와 가장 친한 친구마저도 그런 은희를 수차례 배신한다.
오직 한자학원의 선생님, 김영지만이 그런 은희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온전히 존중한다.
​김영지란 인물 역시 정확한 전사는 없지만, ​​학생운동으로 큰 상처를 안고 사는 인물이란 걸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은희에게 수업 중 질문을 던진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 정도야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알아주는 이는 과연 그 얼마나 있을까?
은희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질문에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질문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살아가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이가 있다면 그 삶은 제법 훌륭한 삶이지 않을까?



미시적으로는 은희의 성장담, 거시적으로는 90년대 야만과 폭력성에 대한 증언


영화 초반 학교 장면이 배치되어 있는데 성적에 따라 분반을 한다.
그 과정에서 담임교사가 하는 말이 잊고 있었던 그때의 기억을 소환한다.
"공부도 못하는 게 왼쪽, 오른쪽 줄도 못서냐?"
​그때는 일상적으로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다.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그때는 뭘 잘못했어도 맞았고, 뭘 잘했어도 맞았다.
성적이 올랐다고 맞지 않은 적도 있었고, 성적이 떨어졌다고 더 맞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게 워낙 일상다반사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스크린으로 보니 너무나 폭력적이라 저런 일을 당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담임교사의 폭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같은 반의 날라리를 무조건 2명씩 색출하라는 것.
친구에게 친구를 팔라고 강요한다. 마치 친구의 뺨을 서로 때리게 하는 것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그때는 너무나 많이 흔하게 그랬다.
​교사가 그러하니 학생들 역시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은희를 보고 반 친구들은
'대학도 못 가고 우리 파출부라 하게 될 거'라 충격적인 폭언을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가해자고, 다른 한쪽이 피해자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당시 사회구조가 누군가를 짓밟으며 성공하길 바라는 경쟁 중심의 사회였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 가운데서 수많은 은희가 양산(?)되었으며,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나 역시 거기에 해당했다.



그 야만성의 정점, 성수대교 붕괴사고.

 
지금도 그때 기억이 뚜렷하게 난다.
나도 은희처럼 중학생이었고 아침에 학교에 가는데 TV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졌고,
다리의 일부분이 한강 위에 둥둥 떠 있었다.
그리고 찌그러진 버스에서 나뒹구는 가방, 도시락 가방 등을 보았다.
잘못 한건 어른들인데, 항상 죽는 건 학생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이다.
90년대엔 저런 사고가 한두 건이 아니다 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건,
95년 4월 상인동 가스폭발사고, 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형사고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그때를 사고공화국이라고 불렀다.
​다행히 은희가 걱정한 것처럼 은희의 언니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은희의 한문샘, 영지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그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은희로서는 세상의 반을 잃은 것만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
나 역시 95년 4월 상인동 가스폭발사고로 생사를 오갔던 트라우마가 있는 터라
은희의 그 고통을 온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그때는 다 그랬다고, 넌 안죽고 살지 않았냐고 얼버무리지만,
과연 지금은 그때와 얼마나 다른가 라는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다.
​더불어 내가 다른 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느냐는 질문에도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그 기준은 이 영화에서 제시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한문샘, 김영지다.
내가 내 주변의 사람에게 김영지처럼 그렇게 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에게 김영지처럼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충분히 빛나는 삶을 살고 있다.





<벌새>를 통해 과거를 반추하고 싶은 씨네필은
'씨네아트 리좀'에서 그 소중한 만남을 가져보길 바란다.
- 씨네아트리좀 프로그래머 박성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