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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정전> 왕가위와 장국영, '발 없는 새'로 새로운 홍콩영화의 시대를 함께 열었던 두 전설의 시작관리자작성일 20-06-15 00:00



<아비정전>
왕가위와 장국영, '발 없는 새'로 새로운 홍콩영화의 시대를 함께 열었던 두 전설의 시작 



 
<아비정전 (1990)> 줄거리
자유를 갈망하는 바람둥이 ‘아비’는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을 찾아간다.
그는 그녀에게 이 순간을 영원처럼 기억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기며 그녀의 마음을 흔든다.
결국 ‘수리진’은 ‘아비’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결혼하길 원하지만,
구속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아비’는 그녀와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
‘수리진’은 결혼을 거절하는 냉정한 그를 떠난다.
그녀와 헤어진 ‘아비’는 댄서인 ‘루루’와 또 다른 사랑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도 역시 오래 가지는 못한다.
‘루루’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한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나게 된다.
한편, 그와의 1분을 잊지 못한 ‘수리진’은 ‘아비’를 기다리는데…

 







내러티브를 뛰어넘어 인물의 외로움과 슬픔마저 이미지로 담아낸 수작.
90년대 홍콩 뉴 웨이브의 시작을 열었던 왕가위와 장국영의 첫 만남.



90년대 한국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감독, 왕가위

왕가위는 홍콩이 낳은 마지막 세계적 영화감독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10년 전 <열혈남아>란 영화로 데뷔했고,
반환된 이후에도 십여 년 동안 작품활동을 했지만, 이제는 그 빛을 잃었다.

하지만 왕가위는 동시대 다른 홍콩감독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오우삼, 서극과 같은 거장들이 무협이나, 범죄를 근간으로 남성미 넘치는 액션영화를 찍었다면,
왕가위는 그 시기 본토반환이란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았던 홍콩 사람들의 불안한 내면에 초점을 뒀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을 보면 대다수가 현실에 발 딛지 못하고 방황하는 캐릭터들이 많다.
데뷔작 <열혈남아>부터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이 모두 거기에 해당한다.
또한 그런 점은 당시 '밀레니엄 버그'로 대표되는 혼란스러운 세기말의 상황에 놓인 전 세계의 관객들에게 어필했다.
왕가위의 90년대, 아니 2000년대 영화들까지 모두 한국의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분야를 넘어 문화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9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위상은 초라하기만 했다.
우리 스스로도 한국영화를 '방화'라고 낮춰 불렀지만, 동시에 새로운, 잘 만든 영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봉준호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던 <모텔 선인장>, 정우성이 방황하는 십 대의 모습을 보여줬던 <비트> 등
90년대 후반 한국에서 만들어졌던 대다수 영화들이 왕가위의 자장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고의 메소드 연기를 펼치는 장국영의 제 1 캐릭터. 아비, 발없는 새.

현재 씨네아트리좀에서 인기리에 상영 중인 <패왕별희> 속 '장국영'의 모습도 너무 매력적이지만,
<아비정전> 속 장국영도 그에 못지않다. 아니 난 아비의 모습이 보다 인간 장국영에 가깝다고 본다.
장국영 역시 자신의 어린 시절 상처와 맞닿은 '아비' 란 캐릭터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장국영은 어린 시절 가정교사와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부모와 떨어진 10대 초반의 장국영은 실제로 자신이 버림받았단 생각도 했다고 한다.
<아비정전>의 아비 역시 그러한 상황이다. 친모에게 버림받고,
계모에게 길러져 겨우 친모를 만나러 갔지만 거절당한다. 끝까지 버림받은 거다.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그의 모습이 짧은 인생의 중후반기에
여러 문제로 방황하던 장국영의 모습이 겹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장국영은 아비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감춰뒀던 상처들을
다시 꺼내 펼치는 메소드연기를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연기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 속에서 장국영의 대사들은 모두 명대사 목록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등장의 '꿈에서 만나자'는 말부터 마지막 '발 없는 새' 까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왕가위와 장국영은 홍콩의 앞날,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를
이 영화를 통해 예측하지 않았나 하는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본다.



애초 2부작으로 기획되었지만... <아비정전>의 비하인드 스토리.

데뷔작 <열혈남아>의 흥행과 비평의 성공으로 왕가위는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새로운 홍콩영화에 대한 기대로 왕가위는 절대적 권한을 갖고 <아비정전>을 찍을 수 있었다.
심지어 당시 홍콩 탑배우들을 총동원했다. 장국영, 유덕화, 장학우, 장만옥, 유가령, 양조위...
당시 농담으로 왕가위 때문에 다른 감독들이 촬영을 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런 스타들을 데리고, 심지어 대본도 제대로 없이 그날그날 쪽대본을 써가면서 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플롯이 탄탄하지 않다는 걸 볼 수 있다.
영화 엔딩장면을 보면 관객들은 느닷없는 양조위의 등장에 의아해진다.
그 까닭은 <아비정전>이 애초에 2부작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관객들의 눈높이를 너무 앞서 나간 영화는 홍콩과 한국 모두에서 참패를 맞이했다.
그러니 그 어떤 투자자도 2부에 투자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왕가위는 이 영화의 실패로 4년간 제대로 영화를 찍지 못했다.
다행히 왕가위를 여전히 신뢰한 장국영의 후광으로 겨우 <동사서독>을 찍을 수 있었다.
그만큼 왕가위와 장국영의 신뢰관계가 돈독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둘은 <해피투게더>까지 함께 총 세작품을 함께했다.
개봉 당시 홍콩을 제외하곤 한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아비정전>을 상영했다.
그만큼 당시 한국은 홍콩영화를 좋아했다. 아니 홍콩'액션'영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수입업자들은 이 영화를 유혈이 낭자한 '홍콩느와르'로 포장을 해서 개봉했다.
크리스마스 3일 전에 영화를 보러 간 관객들은 상영이 시작되고 얼마 후부터 술렁이기 시작했다.
왜냐면 유혈이 낭자한 건 고사하고, 제대로 된 액션신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자 참다참다 폭발한 한국 관객들이 지금은 사라진 극장의 유리문을
박살을 내고 항의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전해진다.

이건 <화차>의 변영주 감독이 직접 목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90년대 후반부터를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때 홍상수,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감독 등 이제는 거장이 된 감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감독들은 알게 모르게 왕가위의 '자장' 아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비정전>을 통해 새로운 홍콩영화의 시작을 보고싶은 관객들은
'씨네아트 리좀'에서 그 만남을 가져보길 바란다.
- 씨네아트리좀 프로그래머 박성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