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이다.
우린 영화를 보며 호감이 가지만 어딘가 부족한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는 서사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이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이 정리된 이후 불변의 진리와 같다.
그런 면에서 <저 산 너머> 역시 거기에 정확히 부합한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영웅서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주인공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숙명에서 벗어나려고, 외면하려고 발버둥 치지만 결국 받아들이는 서사다.
자신의 숙명임을 처음에는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벗어나고 싶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는 서사구조인데 이 이야기가 거기에 부합한다.
영화 속 수환은 결코 신부님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린 그걸 탓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환은 오히려 부모를 위해 인삼장수가 돼서, 약도 주고 돈도 주고 싶은 순수한 의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에 보면 누구도 수환이게 저 산 너머로 가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환이 스스로 숙명을 받아들이고, 그때부터는 한발 한발 자신의 힘으로 내딛는다.
마지막에 산길을 뛰다가 멈춰서 주저앉아 얼굴을 파묻는다.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용기를 내서 걸어간다.
그게 바로 성장하고 변화한 것이다.
150년 전, 신을 믿었단 이유로 핍박받았을 이들을 위한 진혼곡.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신부님이 들려주시던 수환이의 할아버지 이야기다.
우린 이런 걸 흔히 '액자식 구조' 라고 하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 이야기 속 이야기'다.
그 에피소드를 보면 중반까지 메인 플롯과 무슨 상관이 있나 의구심이 드는데,
김수환 추기경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란 걸 알게 되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 이 땅에선 종교의 자유가 있어 누구나 믿고 싶은 걸 믿을 수 있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가톨릭을 믿는다는 건 목숨을 건다는 거다.
그래서 영화 속 천주를 믿는 이 땅의 약자들의 눈빛에는 죽음도 각오한 숭고함이 깃들여있다.
나는 8년 전에 마카오에 갔다가 한 성당에 들렀다. 바로 성 안토니오 성당.
거기서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직에 올랐다고 들었다.
그때 무척 궁금했다. 왜 그 멀리까지 가서 믿음을 갈구했을까?
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가톨릭을 믿었을까?
왜냐면 현실이 새로운 믿음을 갈구할 정도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극 중 고을의 수령은 김익현에게 배교를 하면 뱃속의 아이는 살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너에게 죄를 묻겠지만 벌은 아내에게 내리겠다고 했다.
바로 김익현의 말 한마디와 발길질 한 번이면 아내와 아이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때 김익현은 딱 세 마디를 외친다. "천주여! 천주여! 천주여!"
그 순간에도 결국 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진정한 신도의 모습을 보며,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질문을 되새겨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산 너머>를 통해 진정한 믿음에 대한 질문을 받고 싶은 관객들은
'씨네아트 리좀'에서 그 뜨거운 만남을 가져보길 바란다.
- 씨네아트리좀 프로그래머 박성국